우리 모두에게는 깨달음의 본성인 불성이 내재되어 있다. 본래의 자신을 떠나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을 여의고서 부처를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유마경』에서는 번뇌와 악을 지닌 인간의 현실이 곧 해탈을 달성하고 성불하는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즉 번뇌 자리에 보리가 있고, 생사 속에 열반이 있다고 하여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한다. 이는 고원이 아닌 진흙탕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현재 안고 있는 괴로운 문제가 있는가? 사람 사이의 불편한 문제이든, 취직 때문에 힘들어하든, 혹은 어떤 자격증 시험에 괴로워하는 일이든 그 어떤 고통스런 문제를 떠올려 보라. 그 힘든 문제는 끙끙 앓는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거미가 계속 원을 그리며 스스로를 옭아맨 뒤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살면서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고통을 스트레스라는 줄로 스스로 옭아매고 있다. 누가 구제해 줄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구도 구제해 줄 수 없다. 바로 그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물로 스스로 찾아야 한다. --- p.18~19
배고픈 중생에게는 먼저 먹을 것을 주고, 자식이 죽어 고통 받는 이가 있다면 손을 잡고 함께 울어 줘야 한다. 또한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하소연을 들어 주고 맞장구를 쳐 주며,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줘야 한다. 바로 이렇게 감정을 공유하는 진정성이 진리요, 다르마요, 법문이다. 이성적인 냉정함이 아니라 감정을 나누는 공감과 소통이 진정성 있는 중생제도라고 본다. 이것이 함께 슬퍼해 준다는 비무량심(悲無量心)이다.
신라 시대 원효 스님과 더불어 민중불교를 이끈 대안大安 스님이란 분이 있다. 괴이한 옷차림을 하고 항상 저잣거리에서 구리 밥그릇을 두드리며 “대안, 대안” 하고 다닌 데서 스님을 ‘대안’이라 하였다.
어느 날 원효가 대안을 만나기 위해 굴로 찾아갔다. 그런데 대안은 없고 너구리 한 마리가 죽어 있었는데 새끼 너구리가 죽은 어미 곁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원효는 죽은 너구리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아미타경』을 염하였다.
이때 대안이 들어와 원효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원효가 죽은 너구리에게 염불을 해 주고 있다고 하자, 대안이 이렇게 말했다.
“이 새끼 너구리가 경을 알아듣겠소!”
그리고 동냥해서 얻어온 젖을 너구리에게 먹이며, 원효에게 말했다.
“이것이 너구리가 알아듣는 [아미타경』입니다.” --- p.34~35
[유마경』에도 ‘직심이 바로 도량[直心是道場]’이라는 말이 있다. 광엄 동자가 바이샬리 성문을 나가려고 하는데, 마침 그곳으로부터 들어오는 유마 거사를 만났다. 동자가 유마에게 ‘도량을 찾아 성문을 나가려고 한다.’고 하자, 유마 거사는 ‘자신은 지금 도량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하면서 마음이 곧 도량이라고 설해 준다.
현재 머물고 있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고요히 다스릴 수 있다면 머문 그 자리가 깨달음을 구하는 도량인 것이다. 그러니 굳이 고요한 숲속에 머물러야만 도를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갖춰진 장소에서만 도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머무는 일상의 장소에서, 일상적인 자신의 행(行) 하나하나를 참된 마음으로 수행할 때, 바로 그 마음이 도량이다. 인간의 행주좌와(行住坐臥) 일체 동작이 법계(法界)가 되며, 신·구·의 3업이 부처의 행이다. 곧 행위 하나하나 그 자체가 부처의 행이라는 ‘행즉불(行卽佛)’이라고 볼 수 있다. --- p.141
행자에 불과한 혜능이 오랑캐라고 언급하는 홍인 선사에게 당당히 맞서는 모습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불성에 남과 북이 없다고 말한 혜능의 답변은 사람이 태어난 장소는 구분할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 혜능이 언급한 불성은 참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누구에게나 구족되어 있는 청정한 본성이다. 혜능의 답변은 이후 선종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으며 선사들의 문답에도 단골로 등장한다.
초기불교 승가에서는 승가의 구성원 모두가 평등하다고 율장에 엄격히 규정되어 있다. 그래서 비구가 되려는 사람은 출가할 때 가문이나 출신 등 모든 사회적 속성을 버려야 한다. 이 점은 대승불교에도 그대로 용해되었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았다. [숫타니파타』에도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비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며,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의 행위로 천한 사람도 되고, 행위로 바라문이 된다.”라고 하였다. 즉 부처님께서 당시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며 인간 평등을 주장한 이 사상이 불성 사상의 단초인 것이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누구나 고귀한 존재로서 마음 닦는 수행을 통해 불성을 발현하는 것이다.
--- p.156~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