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시 고다드야.” 그 애가 손을 내밀었다.
“알아, 나는 홀란드…….”
“재거. 나도 알아.” 우리는 둘 다 신경질적으로 작게 웃고서는 악수를 했다. “네가 학생회장이지?”
“어떻게 알았어?”
그 애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지 뭐.”
“애기야.” 세스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아직도 시시의 손을 붙들고 있다는 걸 문뜩 깨닫고 황급히 놓았다. 내가 왜 그랬지? 그냥 서로 인사하는 중이었을 뿐이잖아. 세스가 한 팔에 책을 잔뜩 끼고 복도를 걸어와서는 남은 팔로 내 허리를 감싸더니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오랜만에 뽀뽀할까?” 고개를 숙인 세스가 내게 입을 맞췄다.
나는 곁눈으로 시시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 p.29
“이성애자를?” 시시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니까 동성애자-이성애자 연대를 만들자는 거지? 와, 그럼 회원이 16명으로 늘어나겠구나.” 그러더니 내 손에서 신청서를 빼앗아갔다. “미안,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거든. 적어도 내가 원하는 건 말이야. 이성애자들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이해 못 해. 정말 중요한 문제들도 이야기할 수가 없어. 커밍아웃이라든지 폭력에서 벗어나는 방법, 섹스 같은 것 말이야.”
--- p.92
“어째서 더 많은 사람들이 커밍아웃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 말은 우리 학교에 게이나 레즈비언이 더 많다는 암시였을까? 아니면 시시는 확실히 알고 있는 걸까? 그 애들은 누굴까?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 애들은 복도를 지나다니면서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까? 세상에, 상상도 못 하겠다. 매일같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면서 자기를 보호해야 한다니. 쓰레기들을, 혐오자들을 상대해야 한다니.
--- p.100
수영을 했다. 위로, 아래로, 스트로크를 할 때마다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수영장 모서리를 터치하고, 몸을 구부리고,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반대쪽으로 턴하면, 그 애.
모든 것이 그 애였다. 빛도, 어둠도, 낮도 밤도, 그 애, 그 애였다.
아침에 일어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도, 잠들기 전 마지막까지 나를 사로잡는 생각도 그 애였다. 그 애가 내 영혼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애는 내 안에 있었고, 나를 휩싸고, 나를 압도해서…….
그래서? 물에 빠뜨려버리자. 이 힘에 맞서 싸워 이기자. 할 수 있어, 홀란드. 강하잖아. 저항해. 이 힘을 이길 수 있어. 그래야만 해. 헤엄쳐. 팔을 휘둘러. 숫자를 세. 또 세. 할 수 없어, 할 수 없어, 할 수 없다.
--- p.162~163
“나도 다 셀 수가 없어. 그렇지만 정말 괴로운 건 사람들 표정이야…….” 그 애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품고 있는 혐오가 너무나 커. 그래서 무서워. 알겠어? 물리적인 폭력이 너무 두려워. 그날 자판기 앞에서 있었던 일? 그때 나는 겁이 나서 미칠 것 같았어. 그렇다고 그게 겁나서 숨죽이며 살 수는 없어.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두렵지도 않아. 나는 동성애자인 게 자랑스러워. 그렇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어. 거지 같은 일들을 정말 많이 참아야 했어. 그런데 네가 그런 일들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어. 단 하나라도.”
--- p.206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시시가 말했다. “지금은 말이야.”
나는 그 애의 눈을 바라봤다.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그 눈. 그 순간 그 애가 나를 보호하려 한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애가 상처받는 모습을 절대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약속할게.”
“좋아.” 시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는 커피를 마시려고 컵을 들며 내게 웃음을 보냈다. “그때까지는, 때가 될 때까지는, 너를 비밀로 할게.”
--- p.207~208
“왜 헤어진 거야?” 리아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홀란드.”
그렇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내가 레즈비언이 됐다고? 처음부터 레즈비언이었는데,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없었다.
“우리랑 이야기하기 싫다잖아.” 커스틴이 팔을 내렸다. “내 말 맞지? 쟤는 이제 우리가 필요 없대.”
“아냐.” 나는 친구들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리아가 내 손을 잡았다. “정말 속상하겠다, 홀. 얼마나 힘드니.”
커스틴이 손가락을 딱 튀겼다. “좋은 생각이 있어. 동아리를 만들자. 영남포, 영원히 남자를 포기한 사람들. 어때?”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왜 웃는지 얘들은 모르겠지.
--- p.217
“저 시시를 사랑해요.”
엄마가 내 뺨을 한 번 더, 더 세게 때렸고, 나는 식당 쪽으로 나가떨어지며 엉덩이를 그릇장에 찧었다. 닐 아저씨는 테이블 앞에 앉아서 한나에게 젖병을 물리고 있었고, 페이스도 슬금슬금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엄마가 나를 덮치더니 주먹으로 등을 마구 때렸다.
“엄마!” 나는 엄마를 막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엄마는 미친 사람 같았다.
닐 아저씨가 행동에 들어갔다. 뒤에서 엄마를 못 움직이게 붙든 뒤 말했다. “이제 그만해요. 폭력까지 쓸 필요는 없잖아.”
엄마가 고함을 쳤다. “나는 너를 레즈비언으로 키우지 않았어!” 그 단어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말이라도 된다는 투였다. “역겨워. 변태 짓이야. 너는 변태야.” 닐 아저씨가 엄마를 꽉 붙들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엄마를 진정시키려고 엄마에게 다가가며 설명했다. “아름다운 거예요,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어요.”
--- p.233~234
시시에게 티셔츠를 선물 받았다. ‘아무도 내가 레즈비언인 줄 몰라’라고 적혀 있었다. 맞다. 나 커밍아웃하기로 했지. 그렇다고 이렇게 과감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차라리 확성기에 대고 떠드는 게 낫겠다. “다들 주목하세요. 홀란드 재거가 레즈라는 공식적인 보도가 막 들어왔습니다.” 아니야. 나는 내 방식대로 하기로 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내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사람들, 그리고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부터.
--- p.291
선택할 수 있는 게 정말 많았다. 아주 많았다. 나 자신에 관해 모르는 것도 아직 참 많았다. 탐색할 가능성들이 아직 많았다.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어떻게 안담? 그런 걸 미리 계획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전공 목록을 다시 한 번 훑어본 다음에 나는 마음을 정했다. 순리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자. 마지막 줄에 대문자로 써넣었다. “미정.”
--- p.319~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