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5/18 이상구(flypaper)
<댄스 댄스 댄스>에 보면, 유키의 엄마를 만나기 위해 하와이로 떠난 남자 주인공(이름이? 모르겠다. 편의상 H로 하자)이 유키가 서핑을 즐기는 동안 가판대에서 '플레이보이'지를 사서 시간을 떼우는 장면이 나온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플레이보이'라니? 도대체 H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동양의 핀업걸이라도 찾고 있는 걸까? 멋진 실리콘이 즐비한 와이키키에서 '플레이보이'지를 보고 있는 성인남자 H....약간 도착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장면인데....일단 넘어가고....
몇해 전 누드모델 이승희씨가 동양인으로선 드물게 플레이보이지의 커버모델을 장식했던 에피소드가 있었다. 모국을 방문해 모 연예프로에 출연했던 그녀는, 수많은 남성 시청자들을 의식했던지 '플레이보이'지는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라는 알듯말듯한 멘트를 남기기도 했었다.
흔히 '펜트하우스'나 '허슬러'와 함께 3대 도색잡지의 목록에 포함되곤 하는 '플레이보이'지는 사실 이승희씨의 말따라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렇다고 '품격있는 성인지'라고 둘러대긴 뭐하지만, 어쨌든 조금 다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뉴요커'와 '리더스 다이제스트','펜트 하우스'를 섞어 놓은 정도라고 할까? 섹스 산업의 시스템 자체가 한국과는 다른 서양에서는 도색잡지의 구분 자체가 모호해지는 경향이 있다. 요컨데 대중적인 성인취향의 정보지 정도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는데....막강한 자본력이 부가된 이러한 시스템은 판매 부수로서 증명되는 아주 그럴듯한 볼거리를 만들어 내곤 한다. 대중적인 취지하에서 기획된 그러한 잡지 속에는 볼거리로서의 최고의 핀업걸 뿐만 아니라, 읽을거리로서 세계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수많은 쟁쟁한 작가들의 단편소설도 포함되곤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정을 염두해 두면, 와이키키 해변에서 H는 플레이보이지에 실린 업다이크의 신작소설을 읽고 있었다고도 말 할 수 있는 것이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라고 했던 이승희씨의 말은 '플레이보이지는 누드모델들의 사진만 잔뜩 실려 있는....그런게 아니에요!'라는 앙증맞은 항변의 말 정도로 이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플레이보이지가 1994년에 창간 40주년을 맞이했다. 창간 40주년 기념사업으로 기획된 'Playboy Stories'가 이 책의 원전인데, 이 책 속에는 그 동안 '플레이보이'지가 선보인 수백편의 단편들 가운데 매년 하나씩 엄선한 41편의 단편들을 묶고 있다. 이 책 <플레이보이, 단편소설 컬렉션>은 그 원전 속에서, 단행본 한권 분량에 맞춰 10개의 단편소설을 추려서 엮은 것이다. 3대1의 경쟁률을 뚫고 선택된 작품 속에는 마르케스, 보르헤스, 폴 테로, 존 업다이크 등의 단편이 포함되어 있으며, 아쉽게도 탈락된 작품 속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나딘 고디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존 치버, 조셉 헬러, 어윈 쇼 등의 단편이 포함되어 있다. 탈락된 선수들로 팀을 짜도 충분히 드림팀을 구성할 수 있는 호화 멤버인 셈이다. 그 중 몇 작품을 살펴 보면.....
우선 표제작을 차지하고 있는 가브리엘 G. 마르케스의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익사체'는 10개의 단편 중에서 가장 짧은 분량이다. 하지만, 읽는 재미는 솔솔하다. 늘 느끼는 거지만, 마르케스의 작품을 읽을 때는 '여기는 남미야. 난 열정적이고 즉흥적인 남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거야. 야자수가 보이지? 삼바 리듬에 귀를 기울여 봐? 그네들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해야 돼.'라는 자기 최면이 필요하다. 홀연 떠내려온 건장한 체격의 익사체를 둘러싼 풍문의 세계에 대한 에피소드. 그 에피소드 속에서 여인네들의 막연한 동경과, 남정네들의 시샘이 얽히 섥히는 과정이 재밌다. 있을법하지 않은 설정(부패되지 않고 잘 생긴 익사체)을 통해 조용한 어촌 마을에 잔잔한 파문을 안겨주는 마르케스의 매직쇼가 흥미롭다.
이 책에 실린 작품 중 유일한 여성작가의 단편인 로리 콜윈의 '정부(My Mistress)'. 야! 이거 참 재밌는 단편이다. 빌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나, 프랭크'의 정부인 이 여자는 참 귀엽고, 사랑스런 캐릭터이다. 비록 프랑스 영화에서 나오는 세련된 정부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털털하고, 퉁명스러운 모습이지만....묘하게도 그런 모습이 한층 더 매력적이다. 우리 나라도 하루 빨리 IMF를 벗어나고, 정부 시스템이 자리를 잡는 그 날을 대비해서라도 꼭 읽어야할 필독서(?) 중의 하나다. 대통령 말따라 21세기에는 준비된 자만이 살아 남는 법이다.
리차드 메디슨의 '매춘부 전성시대'. 소개글에는 신선하고 끔찍한 공포소설이라는데, 하나도 안 신선하고, 하나도 안 끔찍하다. 재미없다. 굳이 교훈을 하나 찾자면....'바람 피울 때는 철저하게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은폐하라! 누구도 믿지마라!'정도일 뿐, 영화로 잘 만든다고 해도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 작품이다.
필립 로스의 '이웃집 남자' 또한 바람 피우는 얘긴데, 여기선 '아무리 철저하게 자신을 은폐한다 하더라도, 역시 불륜의 사랑에는 운도 따라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어지는 뱝 샤코치스의 '섬'과 존 업다이크의 '혼란스런 여행'은 산만하게 읽었던지 별다는 기억은 없다. 다만 단편적인 상황만이 떠오를 뿐인데, '섬'에서는 이른 저녁부터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 조용하게 세상을 뜨는 틸만씨의 어머니....그 어머니의 편안한 죽음의 정경이 떠오르고, '혼란스런 여행'에서는 어느 사원 벽에 씌여진 '여자는 천국이다'라는 상형문자를 읽어 주던 포파 오마르의 장난스런 모습이 떠오른다.
식목일날 구입했는데, 다 읽는데 20일 이상이 걸린 책이다. 게중에는 두 번 읽었던 작품도 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은 작품도 있다. 단편집이라는게 원래 그런거다. 특히나 이처럼 한 작가의 단편집이 아니라, 여러 작가의 작품을 종합선물세트처럼 묶은 책인 경우에는 그 편차가 더욱 심한 법이다. 어쩔 수 없는 편식인 것이다. 여튼 힘들게 읽은 만큼, 보람도 있었던 '플레이보이 단편소설 컬렉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