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알려진 바와 달리, 스물다섯 살이란 여자들이 처음으로 심각하게 희망을 잃는 나이이다. 사회와의 절연인 결혼을 선택해 한 십 년쯤 아이를 낳아 키우든지 사생활 결핍이 내정되어 있는 독신의 길을 선택해 사회 친화적 캐리어를 맹렬히 쌓아가든지. 혹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노마드적 의식으로 연애와 문화적 사치를 향유하든지, 생의 전도는 불구적이고 빈약하고 근본적인 결함이 느껴진다. 그런데도 수로 속을 흐르는 물처럼 주어진 구소 속에서 흘러가는 수 밖에는 없다.
--- p13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야. 깨닫지 못하거나, 솔직하지 않아서 일 뿐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아.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선택되고 선택된 전제하에서 동의하지. 사실 남성 위주의 경제 구조가 오늘 날의 성의 구조를 만들었어. 남자들은 자신만의 아이를 낳는 한 여자에게 돈을 내고 배타적 섹스를 하고 여자는 한 남자에게서 돈을 받고 그 남자의 아이만을 합법적으로 낳는 배타적 섹스를 하는 그게 일부일처제지. 그 거래가 성립되지 않으면 부부관계도 폭력이 되는 거야. 배타적 관계도 무너지지.
--- p.111-112
집을 떠날 때, 언젠가는 엄마에게 진심을 말하리라 생각했다. 엄마, 나 의연하게 굴었지만 사실은 말이야. 그날 집을 나왔을 때 , 눈 앞이 보이지 않아 비틀거렸을 정도로 무지 슬펐었어... 슬픔이 블라인드같이 눈을 가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 장님이 된 것 같더라니까. 슈퍼마켓 앞에서 어깨를 전봇대에 세게 부딪쳤을 정도로, 세상이 깜깜했어. 정말 엉망진창이었다구. 엄마를 실제로 떠나는 건 처음이었쟎아....
--- p.153
이상한 일이다. 이야기는 지워지고 배경과 소리들과 촉감과 냄새들만, 그 사소함과 고요함과 찬란함만이 이토록 생생한 진실로 되살아나는 것은, 그것들이 시간을 무너뜨리며 현기증이 나도록 빠르게 덮쳐와 몇 번이고 다시 현재성을 획득하는 것이...
--- p.
--소녀기를 지나 자의식이 눈을 뜰 무렵 세상에 대해 가장 먼저 생긴 의심은 아버지가 딸에게 가르치는 교훈들과 미덕들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부권 문화에 잠식되어 이의 없이 순응해온 엄마들의 공모도 포함된다. 이 사회의 지배 구조는 친딸에게조차 불공정하고 억압적이고 기만적이고 차별적이며 편의주의이다. 그러므로 딸의 생에 대한 진정한 자각이 없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양부이며 그들의 양육은 양부의 양육이고, 그들의 교훈은 양부의 교훈인 것이다. 말하자면 우울하게도 우리는 대부분 양부의 딸이다.(2권p.204-205)
--- p.
내가 떠나게 되었을 때, 엄마는 지방에서 방 한 칸쯤은 얻을 수 있는 수표 한장을 여행 가방에 넣어주었다. 내가 만약 결혼을 하려했다면 겨우 그 정도의 비상금으로 해결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어쩐지 쫓겨나는 억울한 기분과 지나치게 늦은 자립이라는 회한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양부와 엄마는 나의 마지막 등록금을 냈던 그날로부터 바로 이날을 학수고대했을 것이다.
이제서야 그 낡은 이층 집엔 늙은 남편과 갓난쟁이 아기라는 혈통적으로 순수한 진짜 가족만이 남게 된 것이다. 여전히 경박할만큼 금술이 좋은 양부와 엄마로서는 동화의 결말 부분처럼 행복한 대단원이었다. 비록 집이 팔리는 대로 두 아들에게 얼마간을 나누어주고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해야 하지만 단촐한 핵가족이니 22평쯤 되는 서민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새들의 지푸라기 둥지처럼 헐겁지만 아늑하지 않을까.
마흔일곱 살의 엄마와 예순두 살의 양부는 둘 다 건강했다. 양부의 쾌청한 얼굴과 달리 엄마는 무표정했지만, 엄마 역시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혼한 후 거의 14년 만에야 전처의 아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고 데리고 들어온 미안스럽고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었던 딸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를 얻은 것이다.
---pp.151~152
-나도 그래. 내 인생에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남자란 없을지도 몰라.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살아가는 삶은 두려워. 대신 나를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남자로부터 보호받는 태만하고 안전한 삶이 내 몫이 되는거야. 아이를 둘쯤 옆구리에 끼고 사랑도 받지 못한 채. 아무도 보호해 주지 않는 이 세상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여자보다 더 슬픈 짐승이 있을까.
--- p.111
나는 연약함을 경멸한다. 어느 때는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가혹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한다 해도 연약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 152, 153p.
-그러니 당신은 어떤 사람이야? 여자에게 무엇을 바라는 거지? 어떻게든 정리를 좀 해봐.
- 바라는 것 없어. 난 사랑이 가진 모든 속성을 싫어해.
- 너와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아마도 자포자기한 여자일 거야.
-이런, 나를 그렇게 다 파악해 버렸다는 말이야? 비겁하다는 말은 왜 안하지?
-그야 자기 선택이니까.
나는 웃으며 농담으로 돌리려 했지만 내 마음엔 깊은 좌절이 생겼다.
--- p.113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새까만 동전 두 개 만큼의 자유를 가지고 이분 삼십초 동안의 구원을 바라보 있네...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탄채 떠도네... 벅찬 계획도 시련도 없이 살아온 나는 가끔 떠오르는 크고 작은 상념을 가지고 더러는 우울한 날에 너를 만마 술에 취해...
--- p.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새까만 동전 두 개 만큼의 자유를 가지고 이분 삼십초 동안의 구원을 바라보 있네...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탄채 떠도네... 벅찬 계획도 시련도 없이 살아온 나는 가끔 떠오르는 크고 작은 상념을 가지고 더러는 우울한 날에 너를 만마 술에 취해...
---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