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핵심은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보다 남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훨씬 크다는 사실이었다. 사랑의 회계에서 그런 불균형은 자연스럽지 못했으므로, 무엇이 그의 부족한 사랑을 메워주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족한 사랑을 짜증으로 채우는 경우가 많았고, 그의 아내는 남편의 부족한 사랑을 자신의 사랑으로 메우려 했다. 그는 자신의 태도와 아내의 태도가 함께 못마땅했다. 사랑의 회계학은 참으로 가늠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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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내의 얘기는, 다른 때 같았으면, 마음에 무겁게 얹힐 얘기였다. 가까운 친척이 자식들을 잘 가르치려고 잘 사는 나라로 이민을 가는데 자식을 외국으로 유학 보낼 힘이 없다면, 어느 부모인들 마음이 편하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현재의 삶이 과거의 기억을 거침없이 밀어내고 있었다. 아내의효심이 아무리 깊어도, 그녀의 마음은 돌아가신 아버지보다는 제 딸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그도 물론 그렇고. 그것이 자연의 섭리였다.
그 점에선 남녀 사이의 사랑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임을 사랑했을 대, 그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어떤 경우에도 버리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었다. 그때 그에겐 그녀에 대한 사랑을 소홀히 하는 것은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배신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배신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자, 특히 효민이가 태어나자, 그런 다짐은 새로운 다짐들에 힘없이 밀려났다.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과 의무 앞에선 그런 다짐은 풍화한 바위처럼 바스러져내렸다.
그의 입가에 야릇한 웃음이 떠올랐다. '만일 지금 내가 정임이를 옛날처럼 대한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그가 옛날의 기억에 충실하려 한다고 애기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모두 그가 결혼과 가정에 충실치 못하다고 비난할 터였다. 정임에 대한 사랑과 그런 다짐이 그의 결혼이나 효민이의 태어남보다 앞섰다는 사실은 이제 아무런 무게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었다.
마음을 다잡으면서, 그는 정임의 생각을 밀어냈다. 그의 손길에 밀려, 그녀의 앳된 모습이 천천히 물러났다, 서글픔이 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면서, 그러나 원망하는 빛은 없이.
---pp.237-238
그는 놀이에 몰두해서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던 놀이터의 아이들을 떠올렸다. 아쉬움과 체념이 섞인, 낯익은 감정이 가슴을 적시면서, 몸이 나른해왔다. '몸이 늙으면, 마음만으론 어쩔 수가 없단 얘기지. 그럼 내겐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단 얘기구나.'
이어 안도감 비슷한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 깔리기 시작했다. '육체적 감각이 그렇기 무뎌졌다면, 슬픔이나 아픔을 견뎌내기도 좀 쉽겠지. 이번엔 그때보다 견뎌내기가 아무래도 좀 쉽겠지. 정임이와 헤어졌을 땐, 얼마나…….'
"조교수님, 도대체 늙는가는 게 뭡니까?" 박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노화는 무척 복잡한 현상예요. 늙은 사람을 보면, 우린 이내 그 사람이 늙었다는 것을 알아보죠. 그러나 늙음이 무엇이냐 막상 정의하려고 하면, 참 막막해져요. 노화는 다세포 생물들에게 공통된 현상예요, 그래서 모든 다세포 생물들은 늙어서 죽죠. 그리고 노화는 생물에 내재적이죠. 외부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란 얘기죠. 그래서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살더라도, 사람은 늙게 마련이죠. 그리고 진행성이죠. 노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게 아니고 꾸준히 진행되거든요."
---pp.160~161
결혼의 가치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어른들을 만드는 것이다.(P.62)
낯선 사람 둘이 만나서 가정을 꾸미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거기서 제외되지. 현재 자매처럼 가까운 사람들까지...어쨌든 남남이었던 두 사람이 만나서 새로 가정을 꾸미면, 단숨에 높은 담이 솟는거라. 가까운 피붙이들까지 이내 그 담밖으로 밀려나고.'(p.82)
그는 사람의 기억이 흔히 부정확하고 거의 언제나 변형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끔찍한 기억들을 흔히 잊는다. 덜 끔찍한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차츰 잊혀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떤 사건에서 괴로운 면들보다는 즐거운 면들을 자주 회상한다. 그렇게 경험의 부분들을 선택적으로 잊거나 기억해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자신의 삶이 좀 더 가치있게 보이도록 경험의 모습을 담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물론 이 힘든 세상에서 살아나가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p.171)
자신의 이름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알 수 있다....자신의 참이름은 사람이 평생을 두고 씨름하는 수수께께다.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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