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 하나 제대로 못하는 굼벵이 주부 파이팅!
이지영 (jylee721@yes24.com)
2010-05-07
한달 전쯤 집에 도둑이 들었다. 물건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집주인 아저씨는 문고리며 도어락이며 현관문까지, 싹 다 새 것으로 바꿔야 한단다. 이사한지도 얼마 안됐는데…. 우리집도 아닌데…. 구시렁대며 근처 열쇠집과 공업사에 전화해 문고리와 도어락, 현관문 교체 비용을 알아봤다. 이어서 집주인 아저씨에게 총비용을 보고할 차례. 어찌나 까다로운지 통화 한 번 하고 나면 최소 2개월씩은 수명이 주는 것 같다. 이래서 사람들이 내 집 마련을 부르짖나, 잠시 씁쓸해졌다.
그리고 다음 날. 현관문 수리만으로도 힘이 부치는데, 부엌 바닥이 흥건히 젖어 있다. 싱크대에서 물이 샌 것이다. 왜 하필이면 오늘…. 피곤했다. 누가 이런 일 좀 대신해줬으면…. 그 순간,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이런 일을 늘 대신해주던 사람. 바로 엄마였다.
가족 누구도 신경 쓰지 않던 온갖 귀찮은 일들을 도맡아온 엄마. 밥솥을 열면 밥이 있었고, 냉장고를 열면 반찬이 있었고, 당연히 가스불도 들어오고, 전기도 들어왔다.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고, 꼬박꼬박 밀리지 않고 가스비와 전기세를 내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줄 알았던 모든 일들의 배후에는 엄마가 있었음을, 내 살림을 시작하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읽은 책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굼벵이 주부'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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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지내는 가족들 가운데 대부분은 힘들고 귀찮은 일을 분담할 때 특이한 언어 규칙을 사용한다. 포도주를 꺼내러 지하 창고에 들어갔다가 시커먼 먼지와 거미줄을 뒤집어쓰고 나오면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창고 좀 제대로 정리해야겠어!"
그는 이 말로써 깨끗하게 치운 창고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나, 그 숭고한 정리 작업을 몸소 실행할 의사는 없다는 뜻을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시사한다. "누가 차 안쪽에 걸레질 좀 해야겠어!" 하는 탄식도 이러한 기본 태도를 나타낸다. (중략) 가족 중에 아무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 곳에서는 언제나 '누가' 나서야 한다. 그 '누가'가 백에서 아흔아홉은 '엄마'라는 사실을 굳이 말로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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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아줌마가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하며 느낀 점들을 옆집 아줌마와 수다 떨 듯 편하게 써내려 간 '굼벵이 주부'.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것 같아 뜨끔할 때도 있고, 이제 막 살림을 시작한 내 이야기를 읽는 것 같아 반가울 때도 있다. 어느 장을 펼쳐도 대한민국 평범한 주부들의 이야기 같은데, 저자는 오스트리아 아줌마다. 역시 사람 사는 모양새는 어디나 비슷한가 보다.
엄마에게 가방을 선물해놓고 딸 본인이 더 자주 쓰는 것도 모자라 내 가방 어디 있냐며 엄마에게 묻는 일, 헤어 살롱에 처음 가본 아줌마의 엄청난 소외감, 할인점이 멀다고 가까운 정육점에 가서 고기를 산 후 죄의식을 느끼는 일 등 공감 100%의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이게 과연 지구 반 바퀴를 돌아야 닿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맞나 싶다. 우리네 어머니들의 생활과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제목인 '굼벵이 주부'는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 즉 집안일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주부들을 뜻한다. 다른 주부가 1킬로그램의 감자 껍질을 벗길 동안 굼벵이 주부는 감자 한 개 가지고 한숨을 쉰다. (바로 나같은 사람들. 휴...) 그런데 저자는 이런 굼벵이 주부들에게도 위안을 준다. 굼벵이들은 모두 엄청난 고령에 죽었거나 아직도 살아 있다나.
억척 아줌마가 되어버린 중년의 주부님, 이제 막 신혼살림을 시작한 20대 주부님, 아이 키우랴 회사 다니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30대 주부님,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안일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굼벵이 주부님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현모양처가 아니면 어떻고 잘 나가는 미시족이 아니면 또 어떤가. 신사임당만 엄마 대접 받으라는 법 있나? 굼벵이처럼 느려 터졌다면 최소한 오래 살 수는 있다. 주부의 고단한 일상을 웃음으로 위로하는 책. 다 읽고 나니 다시금 싱크대 고칠 기운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