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 강에서 불어온 쌀쌀한 바람에, 빠른 걸음으로 30번가를 걸어가고 있는 케이 스카페타 박사의 코트 자락이 펄럭거렸다. 크리스마스가 불과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꼭짓점 세 개로 죽음과 불행이 연결되어 있는 여기 맨해튼 비극 삼각지대에서만큼은 그런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스카페타의 뒤로는 추모 공원이 있었고, 그곳에 있는 거대한 하얀 천막에는 아직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라운드 제로에서 나온 유해들이 밀봉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왼쪽 앞에는 예전에 벨뷰 정신병원이었다가 이제는 노숙자들의 쉼터가 된 고딕 양식의 붉은 벽돌로 된 건물이 있었다. 바로 그 맞은편에 법의국에서 쓰는 격실이 딸린 하역장이 있었는데, 지금 회색 강철로 된 차고 문이 열려 있었다. 트럭 한 대가 후진을 하더니, 셀 수 없이 많은 합판으로 된 운반대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오늘은 시체 안치소가 제법 시끄러웠을 것이다. 복도에서 쉴 새 없이 울리는 쿵쾅거리는 소음이 원형 극장처럼 울려 퍼졌을 테니까. 시체 안치소의 기사들이 분주하게 어른 크기, 아이 크기의 평범한 소나무 관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도시의 공동묘지에서는 점차 늘어나는 매장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바로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 --- p.6~7
“우린 지금까지 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프로그램을 만들 생각이니까. 그동안 의논해 본 결과, 여기 있는 우리들은 뜻을 하나로 모았소. 당신은 당신만의 쇼가 있어야만 해요. 당신이란 사람에게, 당신이 하는 일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그런 쇼 말이오.” 알렉스가 말했다.
“나란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은 해변 별장에서 좋은 책을 읽거나, 토요일 아침에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지내는 거예요. 난 쇼를 진행하고 싶지 않아요. 이미 말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법의학 분석밖에 없고, 그 일이 내 진짜 인생을 방해하거나, 망치는 일이 없기를 원해요.”
“우리가 하는 일이 진짜 인생이오.”
“전에 나와 했던 이야기 기억해요? 내가 법의학자로서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이 일을 하겠다고 했던 거 말이에요.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이 일로 인해 틀림없이 방해받게 될 거예요.” 스카페타가 말했다.
“블로그에 올라온 글들과 이메일들을 읽어 봐요. 당신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에 놀랄 테니까.”
“난 그런 글들은 읽지 않아요.”
“스카페타 팩터. 당신의 새 쇼에 딱 맞는 제목이오.” 알렉스가 말했다.
“지금 당신은 내가 제일 피하고 싶은 문구를 제목으로 삼자고 하고 있어요.”
“어째서 피하고 싶다는 거요? 그 문구는 이제 흔히 쓰는 말, 클리셰가 됐는데.”
“난 그 문구가 클리셰가 되는 걸 원한 적이 없어요.” 스카페타는 자기가 느끼기에 공격적으로 들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 문구는 이제 유행어가 됐소. 무슨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사람들은 스카페타 팩터를 찾지.”
“당신네 사람들이 방송에서 그 말을 쓰기 시작해서 유행어가 된 거잖아요. 나를 소개할 때도 그 말을 썼죠.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그 표현을 썼어요. 정말 당혹스럽고, 오해할 만한 표현이에요.”
“당신 아파트로 제안서를 보냈소. 자세히 살펴본 뒤에 다시 얘기합시다.” 알렉스가 말했다. --- p.171~172
필라델피아 화재 현장의 거무스름한 물웅덩이 안에서 은발 머리카락, 까맣게 탄 살과 뼈, 벤턴의 브라이틀링 시계가 발견되었을 때, 그녀는 세상이 끝났다고 느꼈다. 스카페타는 그 시신을 벤턴의 유해라고 생각했다. 그의 소지품들 때문이었다. 그런 확신을 할 수밖에 없게끔 되어 있었으므로, 벤턴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방화, 그리고 촉매제의 고약하고 지독한 냄새. 그녀 앞에는 고통과 고독함 외에 아무것도 없는, 헤아릴 수도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공허함만이 펼쳐져 있었다. 스카페타는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자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없어졌다. 그렇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상태로 한 해 한 해 시간을 보내면서 그녀의 뇌는 점점 더 강해졌지만, 마음은 그 반대였다. 그런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벤턴은 그녀에게 자주는 아니지만, 아직까지도 그때 일을 묻곤 했다. 당시 그는 샹도니 카르텔을 피해, 조직 폭력단, 살인을 일삼는 인간쓰레기를 피해 몸을 숨긴 것이었다. 벤턴이 그렇게 한 것은 당연히 스카페타를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마치 그가 위험에 빠지게 되면 그녀 역시 위험에 빠진다는 것처럼. 마치 그가 옆에 없으면 그녀가 위험하지 않을 거라는 것처럼. 그때 스카페타는 어떤 언질도 듣지 못했다. 모두가 벤턴이 정말 죽었다고 믿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연방 요원들이 말했다. ‘제발, 이게 폭탄이 아니어야 할 텐데.’ 석유 아스팔트 냄새. 콜타르, 나프텐 산, 네이팜의 역겨운 기름 냄새. 그녀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 p.192쪽
장 밥티스트의 얼굴 사진이 벤턴의 맞은편에 걸려 있는 평면 스크린 위에 올라왔다. 거의 10년 전, 텍사스 법원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저 자식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벤턴은 벽에 걸린 평면 스크린에 나온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빡빡 밀어 버린 머리에 비대칭 얼굴로, 한쪽 눈이 다른 쪽보다 아래 있었고, 눈 주위는 장 밥티스트가 장님이 됐다고 주장하는 화학 화상 때문에 살들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그는 장님이 되지 않았다. 폴런스키 교도소 경비 두 명이 콘크리트 벽에 처박힌 채, 목이 꺾인 상태로 발견되었다. 장 밥티스트의 짓이었다. 2003년 봄, 장 밥티스트는 자기가 죽인 경비의 제복을 입고, 명찰을 달고 사형수 감방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편리하게도 그 제복 주머니에는 자동차 열쇠까지 들어 있었다.
--- p.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