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5년 10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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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10쪽 | 144g | 125*200*20mm |
ISBN13 | 9788932027838 |
ISBN10 | 8932027838 |
발행일 | 2015년 10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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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10쪽 | 144g | 125*200*20mm |
ISBN13 | 9788932027838 |
ISBN10 | 8932027838 |
서문 사랑의 재발명_알랭 바디우 1장 멜랑콜리아 2장 할 수 있을 수 없음 3장 벌거벗은 삶 4장 포르노 5장 환상 6장 에로스의 정치 7장 이론의 종말 미주 용어 해설 |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할까? 사랑 역시 사람의 감정에 대한 표현이기에, 그 구체적인 모습과 감정들은 겪는 이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기본적으로 사람의 감정은 항상 동등한 수치로 교환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느 한편으로 감정의 무게가 기울면 더 이상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누군가의 사랑 얘기에 공감하기도 하지만, 어떤 스토리에 대해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에 공감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제목으로 설정하고 있는 ‘에로스’ 역시 사랑의 한 형태로 지칭되는 용어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하며, '에로틱'이라는 수식어에서 연상되듯 흔히 격정적인 사랑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의 예술이론에 관한 책으로, 사랑의 한 범주로 여겨지는 '에로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는 독특하게 저자 서문이 아닌 알랭 바디유의 글이 서문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에로스의 관점에서 '사랑의 재발견'이라는 관점에서 저자의 글을 평하고 있다. 책의 목차에 따라 세밀하게 정리하고 있어, 책을 읽기 전에 서문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내용에 대해서 점검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들은 처음에는 다소 어렵게 느껴졌는데, 그것은 아마도 저자가 특정 예술 작품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영화와 그림 그리고 음악 등을 전거로 하여 펼쳐낸 저자의 사랑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논의가 추상적으로 전개되어 다소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저자가 제시한 영화 등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문고본의 크기로 100면 남짓의 간략한 분량이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그리 간단치 않다고 생각되었다. 전체 7장으로 구분하여 '에로스와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세밀한 목차에 걸맞게 다양한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멜랑콜리아’라는 제목의 1장은 라스폰 트리에의 영화 ‘멜랑콜리아’와 그 작품에 등장하는 그림과 음악 등을 예로 들어 에로스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이라는 다소 역설적인 문장으로 이뤄진 2장의 내용 역시 푸코와 레비나스 등의 이론을 끌어들여, 사랑의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성격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지는 항목들에서도 헤겔과 아감벤 그리고 바르트 등 다양한 사상가들의 이론이 동원되면서, ‘포르노’와 ‘환상’ 등의 제목으로 에로스와의 관련을 설명하고 있다.
<에로스의 종말>이라는 책의 제목은, 아마도 진정한 사랑이란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제목에 담은 것이라 이해된다. 다양한 이론을 통해서 에로스의 본질과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이, 마지막 7장에서 ‘이론의 종말’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의미심장하게 생각되었다. 에로스를 포함한 사랑의 본질은 결국 이론을 통해서는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에도 저자는 이 장의 내용 역시 다양한 이론들로 채우고 있다. 실제로 사랑의 본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뿐더러 그에 대한 관점도 사람마다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저자의 논리에 공감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그 본질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별개로,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랑에 대해 재삼 음미할 수 있었던 시간을 가졌던 것에 만족하고자 한다.(차니)
사랑의 발명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이영광 시인의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한다는 마지막 행이 신선해서 좋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가 재독 철학자인 저자 또한 사랑을 발명해야한다는 대목이 있어서 얼른(번개같이) 이 시를 다시 읽어보았다. 역시 마지막 행이 압권이다.
사랑을 새롭게 발명하는 것은 초현실주의의 핵심 관심사였다. 초현실주의의 새로운 사랑의 정의는 예술적, 실존적, 정치적 행동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87)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얇아서(98쪽) 좋다. 더 좋은 것은 저자가 쓴 이 책의 내용이 도통 무슨 말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알랭 바디우(프랑스 철학자)가 쓴 서문이 좋은 참고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인 현대는 이타적 사랑인 에로스가 죽었다고 주장한다. (에로스는 이타적 사랑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자신의 자아를 깨트려야만 타인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는데 성과 위주의 현대사회에서 그런 이타성을 더 이상 찾기가 어렵다고 보고 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저자의 지식을 풍부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철학에 관심이 적었던 독자가 읽기에는 어렵고, 평소 철학에 관심이 있던 독자라면 좀 더 쉽게 저자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서문에 정리해놓은 내용을 길잡이 삼아 읽었다.
1장은 <멜랑콜리아>로 동명의 영화를 사례로 들면서 파괴된 사랑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사랑이 위기인 것은 삶의 영역에 타자가 사라지면서 자아의 나르시시스트화 경향이 강화되는 것이라고 한다. 에로스(사랑)는 타자를 향해 가야하는데 현대의 성과주체들은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익사하고 만다. 이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영화처럼 파국적 재난이 올 때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 그녀는 타자를 향해 열린다”는 것처럼 재앙이야말로 자기애에서 빠져나와 타인을 볼 수 있는 구원의 길이 된다는 내용이다.
책 전체에 인용된 좋은 문장이 많아서 그것을 곱씹어보는 것도 좋았다. 책을 읽다가 밑줄 그은 문장이 새 저자를 만나 긍정되거나 반박을 거쳐 재해석 되면서 또 다른 저서로 탄생하는 법이다. 저자는 강력하게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대상을 사랑하기 위해선 자기 안에 그 대상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하는데 ‘동일성의 지옥’에 빠진 현대인에게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죽음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라든가 ‘사랑의 종말은 자본화에 의한 동일성’ 때문이라고 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내용이 다소 강하다. 현대인의 사랑에 대해 고찰하고 싶은 독자라면 저자가 던지는 질문에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가며 ‘사유’할 수 있는 독서가 될 것 같다.
한병철 교수의 책은 이번이 두번째다. 전에 [피로사회]를 읽었지만 쉽게 읽혀지는 책이 아니었기에 며칠을 두고 읽었는지 모른다. 이 책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피로사회]보다 이해하기는 더 어려웠다. 아마 철학계통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어려운 책들을 고르는지, 그리고 읽다가 어려우면 관두면 될 것을 굳이 꾸역꾸역 읽으려고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전의 세계는 금지명령을 발하고 '해야 한다'라는 당위를 동원하는 규율사회였다면, 지금은 성과사회라고 저자는 전작 [피로사회]에서 말하였다. 그는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라는 조동사의 지배아래 놓여있는 긍정의 사회라고 정의한다. 이런 사회에서 각 개인은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만,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성공이라는 단어로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기에 진정으로 자유롭지는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성과사회는 자본주의의 진화가 낳은 결과이다. 우리사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이 땅에 들어온 성과위주의 평가는 성공을 이루려는 개인들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전체적인 생산성을 극대화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성과를 위해 부단히 자기계발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자기착취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본원리로 자리잡아, 이전 세기의 타자착취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성과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각 개인은 자신이 예속된 주체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달콤함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에로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랑의 정의가 무엇이든지 간에 오늘날과 같은 성과사회에서는 사랑 역시 긍정화되어야 하고,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아래 놓여 있는 성애로 변질되었다. 섹시함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니라 증식되어야 하는 자본으로 간주된다. 사랑은 소비와 쾌락주의적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물론 전부가 다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소비문화는 욕망과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사랑은, 성애는, 포르노화 될 수밖에 없다. 전근대적 상상력은 정보의 희박함으로 특징짓지만, 오늘날의 상상은 디지털 기술 덕분에 온갖 정보로 채워져 있다. 더불어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묘사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이러한 포르노화 경향을 더욱 부채질한다. 그래서 저자는 에로스가 종말을 맞이했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에로스를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영역에 포섭되지 않은 타자를 향한 것'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두 개인 사이의 가벼운 계약관계로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의 최소조건은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오늘날은 이러한 사랑의 싹을 짓누르는 온갖 함정과 위협들로 가득 차있다고 한다. 개인주의, 모든 것을 시장가격으로 환산하려는 태도, 개인의 행동을 조종하는 이해관계 등 경제법칙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철학적인 표현 때문인지 어렵게 느껴지지만, 이것은 쉽게 말해서 타자가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숭고한 희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와 타자가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나의 모든 것을 고칠 수 있는 노력이 아닐까 싶다. 에로스를 사랑, 그리고 타자를 그(녀)로 치환한다면 조금은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사랑은 영혼의 모든 부분 즉, 충동과 용기와 이성을 전반적으로 지배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영혼의 모든 부분은 각기 자기 나름의 쾌락경험을 가지며, 아름다움 또한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오늘날에는 충동이 영혼의 모든 쾌락경험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사랑을 충동과 혼동하면 안 된다고 한다. 사랑은 용기와 이성까지도 관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이 정치와 만나는 접점은 바로 용기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신자유주의는 사랑을 성애와 포르노그래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의 탈정치화를 초래하고 있지만, 사랑은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저자는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에 나서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 일 게다. 신자유주의가 전파하는 성과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