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잠깐 드는 볕을 받으며 차가운 음풍 속에서도 매화는 피어난다. 우리의 생도 그렇게 잠깐 드는 봄볕으로 일년의 험난한 바람 속을 헤쳐나가는 것은 아닐까. 입춘이 반가운 것은, 어쩌면 잠깐의 봄볕을 한껏 받아보고 싶은 소망 때문이리라. -입춘 p.25
사람의 힘이란 얼마나 미약한 것인가. 게다가 문명의 이름으로 우리는 몸속에 숨어 있는 우주의 신비를 막아버렸다. 질박함의 근원이 막히니 시대는 날로 교활해진다. 봄빛은 이미 한겨울부터 서서히 천지를 바꾸고 있었는데, 우리는 고작해야 어느 날 아침 발견한 봄꽃의 개화를 통해서 계절의 변화를 느낄 뿐이다. 차가운 눈 속에서 봄빛을 느끼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회색빛 건물들과 아스팔트는 강항 태도로 우리의 몸이 우주의 질서 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다. 그 벽을 뚫기가 너무도 어렵다. -우수 p.30
한밤중에 앉아 차를 마셔본 적이 있는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듯한 고요한 밤이다. 마음은 또렷하게 깨어나고 우주의 거대한 숨구멍이 내게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인간의 고독감이 물밀 듯이 방안으로 쏟아지는 시간, 온몸으로 그 모든 것을 받아내면서 고요히 찻잔을 든다. 그 마음속에 속세의 명리와 불우는 자취없이 사라진다. 밖에서 눈보라가 거세게 쳐도 집안은 안온하다. 세파가 거칠게 몰아쳐와도 차를 마시는 내 마음은 고요하기만 하다. -곡우 p.81~p.82
어쩌면 마지막 봄일지도 모를 일, 그렇게 아름다웠던 자신의 청춘도 가고 올봄 화려한 꽃들도 소리없이 떨어진다. 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생애가 마지막 봄날 아지랑이 속에서 아련하게 보이는 듯하다. 다시 고개 들어 앞을 바라보니 어느새 여름이 코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사립문 닫고 내 그리움을 달래노라니 여름이 문 밖에서 서성거린다. 이렇게 봄이 다 가고 나면, 채울 수 없는 내 그리움도 가는 봄과 함께 다할 것인가. -입하 p.100~p.101
힘없는 민초들의 삶을 지탱해준 보리가 아니던가. 한겨울 먹을 게 없으면 보리 이삭을 나물처럼 잘라서 멀건 국이라도 끓여 먹을 수 있었고, 보리 이삭 팰 무렵 식구들이 굶주리면 익지 않은 푸릇푸릇한 이삭이라도 잘라서 물에 끓이거나 익혀 먹었다. 부리 한 알이라고 우습게보면 안 된다. 그 거뭇거뭇하고 거친 보리의 표면과 미세한 주름살 속에 우리 조상들의 한숨과 절망과 삶에 대한 희망이 온통 뒤섞여 가득하지 않은가. -소만 p.111
노동은 결코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내 몸을 움직이는 일이며, 내 몸의 괴로움을 감내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건이다. 몸을 외면하는 공부가 횡행하면 그 시대의 학문이 타락하는 것처럼, 몸의 괴로움을 감내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관념만이 횡행하는 노쇠한 사회가 될 것이다. -망종 p.123~p.124
문을 열면 장대비 퍼붓는 듯 집으로 난입하는 개구리 소리, 집안의 불을 모두 끄고 거실에 아무렇게나 누우면 순식간에 나는 시공을 넘어서서 우주의 한가운데 오롯이 서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드넓은 천지에 오직 나 혼자만이 존재한다는 느낌, 그것은 단순히 고독의 차원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다. 먼 길을 걷다가 우연히 고개 돌려 뒤돌아보면 길은 피곤한 모습으로 내
뒤에 흩어져 있고, 비끼는 저녁 햇살 속에 나 혼자만이 서있는 풍경이 떠오른다. -소서 p.136
자신이 살아온 자취를 돌아보는 일처럼 쓸쓸한 일이 또 있을까. 기쁨은 순간 속으로 스러지고
슬픔만 오래 남아 걸어온 길 저편으로 여러 무늬를 만들고 있다. 가을이 성숙과 결실의 계절이지만 다른 한편 추억과 회한, 쓸쓸함으로 가득한 시절이라는 것도 과히 그릇된 말은 아닐 성싶다. 더욱이 고향집을 떠나 객지를 방랑하는 나그네에게,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입추 p.163
이따금씩이라도 집 주변을 거닐어 보라. 얼마나 많은 것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지 감동적으로 경험할 것이다. 그 작은 것들에 감동하는 사이, 우리는 나이를 먹고 머리는 서서히 흰빛으로 변해간다. 흰빛 이슬이 어느새 달빛과 함께 온 천지를 슬며시 적셔 놓듯이. -백로 p.186
어지러움 속에서도 질서정연함을 볼 수 있다면, 호수의 찬 빛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다면, 분주한 삶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둠이 성큼성큼 다가와도 결코 흔들리거나 조바심 내지 않는 편안함, 그것이야말로 내 인생을 바삐 재속하는 모든 외물을 거부하는 강력한 힘이 아닐까. -추분 p.196
찬이슬이 내린다고 한곳에 머물러 있다면 어찌 세상에 우뚝 설 수 있겠는가. 먼 길을 떠나기 위해 들메끈을 고쳐 매는 일은 지식인의 일상사라야 한다. 대가 되면 미련없이 먼 하늘을 날아오르는 기러기의 날갯짓을 배워야 한다. 앞에 놓은 술 한 잔을 얼른 털어 넣고, 저 앞에 놓여 있는 길로 성큼 발걸음을 들여놓아야 한다. 정착과 방랑 사이에서 일렁이는 마음을 잘라버리고 힘차게 길을 나선다. 한로 p.206~p.207
사물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하나의 순간이 섬광처럼 빛날 때 시공을 잊고 우주에 우뚝 선 느낌을 받는다. 이는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나는 태곳적 우주를 마음껏 달리며 내 생명이 곧 우주의 생명이라는 희열을 느낀다. 천지는 명랑하게 개었고 햇빛 찬란한 흰눈을 달고 서있는 저 봉우리들과 숲의 나무들은 허공에 이어져,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한다. 겨울바람에도 꿋꿋이 서있던 소나무도 가지마다 눈덩이를 이고 고요한 자태로 천고의 적막을 지킨다.
-대설 p.246~p.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