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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원점을 바라보며
-돈을 벌어야 하는 아이들 -밥 먹듯이 굶는 사람들 -세계는 내가 사는 동네뿐 -길이 없는 마을들 -사람을 배신하는 험로 -물 한 동이의 생존 -에이즈든 설사든 죽는 건 마찬가지다 -상상할 수 없는 가난 -상식을 벗어난 주택들 -고온에서는 인간의 사고가 불가능하다 -부족하니 불결할 수밖에 없다 -가난한 국가의 무능력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이기주의 -빈민가의 행복 필수품 -인간의 식사, 동물의 식사 -사람에게 친절한 자연은 없다 -거목 아래 어르신들과 민주주의 -어이 없는 죽음들 -에필로그, 다시 원점에 서서 |
Ayako Sono,その あやこ,曾野 綾子,본명 : 三浦知壽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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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물이야말로 중동과 아프리카의 생사를 지배하는 요소다. 물만 있으면 식물이 자라고 그 식물을 먹는 동물도 살 수 있기 때문에 토지 문제의 95퍼센트는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만성적으로 물이 부족한 토지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 보호’라는 말을 의식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자연 현상은 그들의 타고난 본능으로 어느 정도 이해되지만, 거기에는 도시인의 그런 말을 할 때에 갖는 이상주의적인 판타지나 전지구적인 이데올로기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호되어 마땅한 것은 우선 ‘나 자신, 즉 인간’이지 결코 자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 p.73 |
험로는 종종 심각한 비극을 초래한다. 위급 환자나 부상자가 간신히 의료 기관에 도착하기도 전에 호흡이 끊어지고 만다.
선진국과는 달리 수백 미터 내지 1킬로미터 정도 거리에서 병원 간판을 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마을은 대부분 무의촌이다. 이름뿐인 의사라 할지라도, 어쨌든 상처를 꿰매고 지혈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있는 마을까지는 30킬로미터 된다고 치자. 선진국이라면 의료 기관이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해도, 30분 정도면 도착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시속 10킬로미터밖에 내지 못하는 길이라면 30킬로미터는 세 시간이나 걸린다. 그 사이에도 험로는 부상자를 위 아래로 뒤흔들어놓으며 조용히 잠들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출혈은 점점 더 심해진다. --- p.68 |
나는 일정 수준 이상의 고온 속에서는반대로 저온일 때도 마찬가지겠지만 인간의 사고가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먹고 마신다거나, 끈을 맨다거나 또는 물건을 옮기거나 하는 따위의 원시적인 일을 하며 살아갈 뿐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분석하고, 조립하고, 공통 항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여 다시 구축하고, 가공의 조건에서의 추이와 결과를 추정하는 등의 복잡한 작업은 전혀 하고 싶지 않게 된다. --- p.113 |
달걀이 맛있음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달걀을 모으면서 먹어버린다. 그러나 달걀은 고가의 상품이다. 아이들에게 먹일 여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들은 ‘달걀을 먹으면 병에 걸린다’고 가르친다. ‘덜 익은 푸른 매실을 먹으면 죽는다’는 말과 같지만, 덜 익은 푸른 매실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으나, 달걀의 경우는 말짱 거짓말이다.
아프리카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면 달걀에는 분명 독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며 먹지 않는다. 부모는 달걀을 비싸게 팔 수가 있으나, 아이들의 단백질 부족은 해소되지 않는다. --- p.35 |
나는 내 인생의 원점에 불을 밝혀두었는가
좀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삶, 보다 나은 행복을 위해 오늘날의 우리는 행복마저 기술적으로 달성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목적지향적인 우리의 삶에서 놓쳐버린 것은 없는가. 달도 없는 사막의 밤. 볼일을 보기 위해 깨어난 소노 아야코는 손전등을 비춰가며 50보 쯤 떨어진 곳으로 걸었다. 그러나 되돌아올 수는 없었다. 그때의 깨달음은 두 개의 광원이 필요하다는 것.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기 위해 출발점의 광원이 절실했던 것이다. 우리는 과연 내 인생의 원점에 불을 밝혀두었는가. 목적지만 있고 되돌아볼 삶의 원형, 출발 지점의 풍경이 없다면 이렇듯 지금의 내 모습은 의미를 잃고 만다. 그래서 저자는 지금의 행복을 제대로 비춰볼 수 있도록 원점의 나라로 안내하고 있다. 불행한 나에게 평평한 바닥이 절실한 사막, 한 끼 밥을 위해 다니는 학교, 단순한 연고가 없어 썩어 들어가는 발가락. 소노 아야코는 이처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오지에 대한 상식에 한계가 있음을 전한다. 아프리카에서의 엄마는 어린 자식의 배고픔은 염두에 둘 수조차 없이 자신의 배고픔이 간절한 한 인간일 뿐이고, 자연보다 우선 보호되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사막은 한 방울의 물이 귀한 곳이지만 사막의 모래는 잠깐의 빗줄기로도 범람하여 인간을 덮치는 죽음의 물이 되기도 한다. 청결이 기본인 병원은 가난 때문에 재사용되는 주사기로 점점 더 많은 감염자를 낳는 곳이 되어버렸고, 설사나 에이즈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내가 사는 동네가 세상의 전부인 아이들에게는 외국에 나간다는 의미조차 없고, TV나 신문 속에서라도 부러워할 만한 인생의 표본을 접해보지 못한 아이들은 이런 저런 꿈조차 꿀 수 없다. 이렇듯 우리는 문명인의 사고를 뒤집는 또 다른 상식이 존재하는 곳과 동시대를 살아간다. 세계 곳곳에서 방치되고 있는 질병과 기아의 고통을 어찌 우리 문명인의 불행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다시 원점에 서서 행복을 보다 소노 아야코가 이스라엘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들과 여행 중이던 어느 날. 수많은 돌계단을 앞두고 함께 휠체어를 밀던 일행을 놓친 저자는 수고비를 줄 요량으로 원 달러 보이에게 부탁을 한다. 그런데 목적지에 먼저 다다른 소년은 휠체어만 남긴 채 재빠르게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가끔은 소매치기로 한 탕 건지기도 하는 약삭빠른 소년에게 돈 따윈 전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소년은 다만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다는 그들만의 신조를 지켰을 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죽기도 하니까.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장작을 구하기 위해 몇 십 킬로미터도 마다하지 않고 걷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를 굶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양 따위는 상관없이 그저 배불리 먹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꾸는 사람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이들을 보노라면 나와 늘 함께 해왔던, 하지만 그 소중함을 알지 못했던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