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명의 발상지이며 민주정치를 꽃피운 그리스인이 생각하는 시민은 ‘피를 나눈 자’였다. 아테네에서는 부모가 모두 아테네인이어야만 시민권을 부여했다. 아테네의 문화 발전에 큰 공을 세운 당대 최고의 석학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마케도니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 시민이었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법률을 지키기 위해 사형당했지만, 투표권도 가지지 못하고 외국인으로 취급받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저 없이 도망쳐버린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반면 로마인이 생각하는 시민은 ‘뜻을 같이하는 자’라는 점에서 달랐다. 로마인들은 건국 초기부터 정복한 부족을 죽이지 않고 유력자에게 원로원 의석을 제공해 로마의 지배계급으로 편입시키는 전통이 있었다. 이는 경쟁자의 역량을 로마의 역량으로 M&A 하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로마는 기원전 326~284년까지 40년 동안 산악부족 삼니움족과 격전을 벌였다. 전쟁기간 중 로마는 무장을 해제당하고 적병들의 창 사이를 지나가 겨우 휴전하는 불명예(카르디움의 굴욕)를 겪기도 했지만, 삼니움족이 항복한 지 불과 20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삼니움족 평민 출신인 오타틸리우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해 제1차 포에니전쟁의 지휘를 맡긴다. 과거의 적이었던 삼니움족의 전투경험이 고스란히 로마군의 전력으로 흡수된 셈이다. 정복을 통한 영토 확대가 로마의 하드웨어 M&A였다면, 개방성으로 패배자를 동화시키는 정책은 로마의 소프트웨어 M&A였다. 뜻을 같이하는 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식민지 출신이라도 역량 있는 사람은 지배계층으로 편입한 로마는 제국을 경영할 다양한 인재를 지속적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 pp.31~33
산악인 딕 베스는 “인간은 쉬운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 어려운 싸움에서 패배하면서 비로소 성장한다”라고 말했다. 이 경구는 국가나 기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쉬운 싸움에서 이겨 작은 성공에 도취하면 큰 성취를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실패에서 배우는 인간과 조직은 비 온 뒤 굳어지는 땅처럼 더욱 단단해진다. 로마는 패전한 장수도 목숨을 잃지 않고 명예 회복의 기회를 노릴 수 있는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였다. 조직의 무형자산을 계속 늘려나감으로써 결국 지중해를 제패하는 데 성공한 로마와 인재를 낭비함으로써 멸망에 이른 카르타고의 동전의 앞뒷면 같은 역사는 오늘날의 기업경영에도 커다란 시사점을 제공한다.
조직의 속성상 실패자를 영웅으로 만들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범죄자를 만들어서도 안 된다. ‘기술의 혼다’를 이룩한 혼다 쇼이치로는 생전에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다. 혼다는 그런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실패에 대해 이유를 막론하고 책임 추궁만 가혹하게 하면 조직 안에서 새로운 도전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가만히 있으면 성공도 실패도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런 사회나 조직에서는 재수 없거나 힘 없는 사람만 끌려 나와 어려운 일을 맡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무모한 사람이 앞장서서 도박을 걸 뿐이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끌려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하거나, 일이 시작되기도 전에 실패의 책임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방법부터 생각하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조직에서 책임 소재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이 벌어지면 손실을 보는 사람과 이익을 취하는 사람이 생기며, 이런 틈을 비집고 정치적 게임이 벌어진다. 따라서 조직이 실패를 반추해 무형자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조직 전체가 감정을 억제하고 현실을 냉정히 대하는 문화가 튼튼하게 뿌리내려야 한다.
--- pp. 88~89
우수한 조직원으로 구성된 조직이라도 저급한 인간이 지도자가 되면 금세 저급한 조직으로 변모한다. 반면 탁월한 지도자는 수준이 낮은 조직원을 끌어올려 조직 전체를 활성화하는 힘과 통찰력이 있다. 따라서 지도자의 발굴과 육성은 조직이 가진 가장 중요한 프로세스다. 로마의 성공적인 국가경영에는 효과적인 지도자 양성 시스템도 한몫을 했다. 미래의 지도자그룹은 성인이 되고 나서 군대의 장교, 말단 행정직, 군단 지휘관, 지방 행정책임자라는 단계별 과정을 거쳐 자질을 검증받고 경력을 쌓았다. 이는 로마인들이 지도자에게 필요한 자질을 관념적 이론이 아니라 현실적 체험에 기반한 통솔력과 추진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조에서 역량이 부족한 사람이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힘입어 지도자로 성장하긴 어렵다.
조직의 리더는 남의 행동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떠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사람들을 다뤄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 리더십에 필요한 통찰력은 인간사회의 자질구레한 일들과 다양한 측면을 경험함으로써 길러진다. 실제로 군대경험도 없고 조직생활을 해본 적도 없이 공부만 많이 한 사람이 조직운영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 또한 조직을 운영해보지 못하고 혼자서 일해왔던 사람이 벼락출세해 리더가 됐을 때는 혼란과 무능을 보인다. 체계적인 지도자 육성 과정이 없는 조직은 리더가 교체될 때마다 도박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권력에 빌붙어 이익을 얻는 집단이 만들어내는 관성 때문에 저급한 지도자라도 교체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 부담은 조직 전체가 고스란히 지게 된다. 기업은 곧 사람이다. 좋은 자질을 가진 사람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길러지고, 단계별로 검증된 인적자원이 직급별로 풍부하게 있는 조직은 번영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원리를 바로 천년제국 로마의 인재 양성 시스템이 증명하고 있다.
---pp. 136~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