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난기류에 휩싸여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1980년, 미술계에는 우리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건이 터졌다. 즉 '현실과 발언(창립회원은 김건희, 김용태, 김정헌, 노원희, 민정기, 백수남, 성완경, 손장섭, 신경호, 심정수, 오윤, 임옥상, 주재환)'의 출현이다. 이들은 유미주의와 제도 메커니즘 속에 저항 없이 매몰된 형식주의 미술에 반기를 들면서 미술의 본원성을 회복하자는 대의 명분을 내세웠고, 미술을 사회와 정치, 그리고 도시 문명과 관련시켜 총체적인 삶의 반영으로서 자리 매김하려는 입장을 견지했다. 말하자면 이들 세대의 논리에는 현실 모순에 대한 부정과 저항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칭립선언문으로 발표되었다.
"돌아보건대 기존의 미술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이든 유한층의 속물적인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또한 밖으로부터의 예술 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시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왔고 심지어는 고립된 개인의 진실조차 제대로 발견하지 못해 왔습니다.--- "(중략)
이들은 구체적으로 1970년대 미술의 순수주의와 개인주의, 형식주의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미술을 현실 인식의 주체로, 또 그러기 위해 소통의 발언방식을 개발할 필요성을 촉구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런만큼 소통의 개발에 대해 '현실과 발언'은 민감했다. 그들은 어떤 매체일지라도 그것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현실 인식을 고취한 만한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선택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동산방 화랑에서의 창립전 때부터 보이기 시작하였다. 성완경의 사진 꼴라주, 김건희의 상업광고의 차용, 주재환의 만화 등이다. 나중에 이러한 다양한 시각 매체의 관심은 '매체 확장'이라는 문제로 진전되지만, 벽화, 출판, 판화, 사진, 만화, 회화, 조각, 비평으로 확대한 이들의 실험성은 '새로운 것'에 대한 단순한 흥미를 넘는 것이었다.
--- pp333-335
국전 30년은 우리 나라 미술의 전개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상당한 영향력과 문제점을 남겼다는 점에서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나라 미술의 발전을 꾀한다는 목적 아래 열린 국전은 기성 작가의 초대 형식과 아울러 신인 공모 체제를 갖추어 시행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초대 작가 범위 선정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 때의 비판적 핵심은 많은 기성 작가의 명예로운 참여를 봉쇄당하였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누구누구는 추천작가, 심사 위원이 되었는데 같은 연배와 화력의 어떤 화가는 그에게 심사를 받는 일반 출품의 입장에 서게 함으로써 출품 거부 혹은 외면을 해버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국전 초기의 문제점은 이렇든 추천 작가와 일반 출품 작가의 구분에 따르는 불만이었다. (중략) 또한 김은호의 지적에서 암시되어 있듯이 추찬 작가, 심사 위원이 어느 특정한 인사들의 영향력에 크게 좌우되었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폐단이었다. 초기의 심사 위원 구성이 거의 일관되다시피 한 것 역시 이 같은 폐단 가운데 하나로 지목할 수 있다.
--- p.245
고희동이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동경에 유학했을 때도 사실 그는 문인 사대부 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화를 처음 배운 선구자적인 위치에 있던 그가 귀국하고 10년만에 동양화로 전향한 것은, 당시의 문화 풍토가 아직 서양화를 받아들이기에 성숙하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그 자신이 아직 전통적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머리는 아직도 조선조의 사대부 의식을 간직하고 있는데, 그가 추구하는 서양화란 고도의 기술적, 장인적 의식을 요구하고 있어 스스로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할수 있다.
고희동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이 같은 모순은 이후 서양화 제1세대 작가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는데 우리 근대기 미술의 비극이 있다. 김관호, 김찬영 등 서양화 제2,3호로 지칭되는 이들이 한결같이 자신의 작업을 지속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하차한 사례는 바로 머리와 손의 괴리 현상에서 그 요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 pp. 39-40
1967년12월에 열린 청년작가 연립전은 국내 최초의 해프닝과 비판적인 시위를 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충격을 주었다. 전시 기간 중인 12월 14일 무 동인과 신전 동인들에 의해 시행된 '비닐 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과 그에 앞서 소공동 광화문에 이르는 도심을 관통한 피켓 시위가 그것이다. 오광수의 각본인 '비닐 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문명과 정신의 갈등 양상을 보여 주려는 의도를 내포하였다. 비닐 우산을 쓴 여인이 가운데 앉아 있고, 그 주위를 남자들이 비닐 우산에 여러 개의 촛불을 꽂고 돌면서 '새야새야 파랑새야'를 노래하다가 종국엔 비닐 우산을 바닥에 동댕이치고 찢어 없애는 내용이었다. 원래 해프닝이란 핵션 페인팅의 연장선상에 있는 행위의 확대 현상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의 생생함을 미술 현상으로 보려는 경향인데 국내에서 처음 행해진 해프닝에선 순수한 행위의 우연성에다 문명 비평적인 요소를 삽입하려는 의도를 포함시켰다.
--- p.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