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당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보호'를 하자고 나서기 시작하면 여성은 언제까지나 성(이라는 행위, 담론)에서 소외당한 채 보호받아야 하고 격리당해야 한다. 남성들의 성 폭력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고, 남성들의 언어 폭력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며, 남성들의 시선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여성은 언제까지나 어른 취급을 못 받고 어린이나 노약자, 미성년자와 함께 취급되는, 행위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점에서 페미니즘은 오랫동안 삽질만 계속하고 있다. 그레이스 켁의 지적대로, 페미니즘의 일반적인 경향은 이상화된 여성상을 고수하며, 여성은 마치 '무성적'인 존재인 양 상정된다. 여성은 모든 폭력과 더러움에서 꼭꼭 숨겨져 보호받아야 하며, 어떤 위험에도 노출되어선 안 된다.
그렇다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란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누군가가' 욕망을 불러일으켜 주지 않는 여성성이란 게 있기는 한 건가? 아마도 로맨스 영화의 '공인된' 공식, 평화롭고 평등하며 대화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더없이 바람직한 관계 외에는 인가를 받을 길이 없을 것이다. 분명한 답변은, 그 '이상적인', (모든 폭력으로부터의 절연 상태라는) '안전한'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자가 주장해야 할 권리는 '보호받을' 권리가 아니다. 직장 사사로부터, 길 가는 미친놈으로부터, 남편이나 아버지로부터, 모든 남자들로부터 보호를 요청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내놓고 '시선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그게 더 중요하다.
법적·제도적 방비책을 충분히 마련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아무리 법의 영역을 늘려간다 한들 '완벽한 보호'는 불가능하다. 길을 오가는 개인들 뇌리에 박인 심리적 영상, 즉 감수성의 영역에서 승리를 거두어야만 여자의 지위는 높아질 수 있다. 이를테면 매력적인 여자가 동시에 힘있는 이미지를 가질 때, 함부로 못 건드리는 사회적 보호막은 작동될 것이다.
그러니까, 여름에 노출 좀 심한 옷 입었다고 풍기단속법을 적용하는 한, 이 나라는 대놓고 "야하게 하고 다니니까 (성폭행을) 당하지"라는 식의 웃기지도 않은 사회 통념을 밀어주는 강간 도발국일 뿐이다. 뒷구멍으로는 할 거 다하면서 겉으로만 아닌 척, 처녀가 결혼도 안고 섹스 비디오 좀 찍었다고 그 난리 블루스를 떨어대고, 청소년을 보호하겠다고 '미래의 희망' 어쩌고 저쩌고 번지르르한 쇼를 해대는 이 웃기는 나라 안에서는 절대 '여자는 보호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지하철에서 껄떡대는 성희롱범을 피해자 혼자서 열받고 마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같이 그놈을 망신 주고 때려줄 수 있는 세련된 문화가 정착도리 때까지, 성희롱범들은 아주 안전할 것이다.
--- pp.56-58
사실, 나라는 여자의 개인사만을 들여다보아도 야한 여자를 좋아하는 게 먼저였다. 야한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 다음 일이다.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다지 별 기대를 할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 10대가 화려하게 젊은이의 문화·패션계로 진출하면서야, 드디어 여자들의 미감을 충족시켜 줄 만한 미소년들이 대거 등장했다. 물론 이 미소년들의 이미지 경향은 그리 '야하다' 과에 들어가지 않는 편이다. 미소년은 '야하다'기보다는 '예쁘다', '귀엽다' 쪽에서 주로 등장한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드디어 (공적으로) 남자를 대상화하고 즐기게 되었을 때, 그 미감은 만화의 전통에 상당히 의존한, 다분히 소녀 취향적이고 심미적인 차원의 것이었다. 따라서 좀더 직접적으로 성적 매력을 간직한 '야한 남자'의 이미지는 아직가지도 주축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가도 봐야 한다.
'야한 남자'란 아직까지도 외로운 존재다. 남자들이 자기의색을 충분히 개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이면에는 자기네 욕망을 뚜렷이 드러내놓지 못하는 여자들의 사정이 있다. 여자들이 나서서 뼛속까지 야한 남자들을 찾지 않는다면, 아무리 용감한 남성이라도 자신의 야한 본성을 솔직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표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고 전 한국적인 차원에서 말하기 위해서는 경제 성장과 개인주의, 물질적 풍요 속에 떠받들리며 자란 신세대가 필요했듯이, "나는 야한 남자가 좋다"고 온 나라를 들쑤시기 위해서는 관능적으로 해방된 남성들과 그런 남성들을 원하는 여성들이 자립할 사회적·문화적·경제적 토대가 더욱 절실하다.
--- pp.113-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