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프랑스 기자가 판소리 공연을 보러갔다가, 무대를 채우는 배우가 소리꾼과 고수 단 둘이라는 사실, 그리고 장장 8시간이나 공연이 되었다는 점, 그 시간 동안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는 관객에 기가 질려 "대단히 놀라운 오페라"라며 감탄을 하였다 고 한다. 노래라고도 했을 법한 판소리를 굳이 '소리'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 판소리의 특성이 담겨 있다. 노래라고 불리는 가곡, 가사, 시조는 그 내용이 대체로 단순하고 서정적인 반면에 판소리는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한숨소리, 웃음소리 등 인간과 짐승의 감정까 지 표현하는 보다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리라고 하는 것이 다.
--- 판소리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확인된 땅은 중성 토양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한 실험에서 명당의 혈처 지점과 보통의 땅에 달걀을 묻어놓고 76일만에 꺼내보니 혈처에 묻은 달걀은 전혀 부패 하지 않은 채 처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보통의 땅에 묻은 달걀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당시 두 땅의 흙을 농업과학기술원에 의뢰, 분석해보았는데 아주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두 흙 모두 화강암 잔적층이라는 점은 동일했지만 일반흙의 PH는 4.88이 었고, 명당의 흙은 6.90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반 흙은 산성이고 명당의 흙은 중성의 성질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자연적인 환경에서 만들어진 미라들을 보면 토양의 성질과 무관하지 않다. 약알칼리성의 토양, 건조 한 모래사막, 동토지대 등이라는 점이 이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의 풍수지리는 이집트의 미라 사상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둘 다 죽은 자를 잘 모시고자 한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이집트의 미라는 사자가 영원한 삶을 누린다고 믿어 영혼이 돌아올수 있도록 약품 처리 등을 통해 시신을 처리한다면 한국에서는 환생의 목적이 아니라 후손과 의 접촉, 즉 동기감응을 위해 육신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개념이다. 그래서 시신이 오래갈 수 있는, 즉 오백년에서 천년동안 뼈가 자골(紫骨)이나 황골(黃骨)로 남아 있을 수 있는 명당을 찾았던 것이다.
동기감응의 예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세종대왕의 천장이다. 현재 세종대왕이 몸을 누이고 있는 영릉은 원래 광주 이씨 이인손의 묏자리였다. 세종의 묘는 원래 아버지 태종의 곁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환란이 끊이지 않자 세종의 묘를 잘못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대두되었고 결국 예종 원년에 묘를 파헤치니 놀랍게도 수의마저 썩지 않은 채 묘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한다. 이후 세종의 묘를 옮기기 위해 지관이 천하의 명당 이인손의 묏자리를 찾아내어 세종의 묘로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환타지소설을 보는 듯 흥미진진하다. 이는 조상의 기운이 후손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풍수지리의 동기감응의 예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 풍수지리
전세계를 통틀어 우리나라처럼 가문의 일대기를 적은 족보가 보편화된 곳은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족보가 얼마나 특이한지는 유럽의 귀족 사회를 이해하면 더욱 두드러진 다. 유럽에서 공·후·백·자·남작 등의 지위를 갖고 있는 귀족은 대대로 세습되는데 여기에는 철저한 규칙이 있다. 한세대에 한명만이 귀족의 칭호, 즉 영국식으로는 '써(sir)' 프랑스식으 로는 '드(de)'자를 붙일 수 있다. 그렇다면 상속자가 되지 못한 나머지 자식 은? 당연히 평민이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들의 족보 또한 작위를 받은 가문의 당대 위주로 되어 있다. 이런 제도 때문에 유럽의 스릴러물이나 추리소설물에 귀족들의 상속에 얽힌 문제가 단골로 등장하고 있다.
이와 달리 우리의 족보는 한 가문에서 탄생한 사람은 모두 기록할 뿐 아니라 한 개인의 소사(小史)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일생이 간략하게 정리되 어 있다. 생몰연도는 물론 관직이라든가 호를 내려받은 사실, 합격한 사실, 배우자의 관(貫)과 성씨 및 부와 조부의 관명과 생몰연월일도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도 묘지가 어디에 있으며, 그 형태나 방향이 어떤지, 후계자 는 있는지 없는지, 양자를 들인 것인지 아들을 양자로 보낸 것인지, 또는 적자와 서자, 아들과 사위가 구별되어 있다. 이런 족보를 늘 끼고 살아왔기 때문에 한때 전세계를 감동시킨 미소설 『뿌리』가 한국의 안방을 강타했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헤일리가 한국에 살았더라면 7대조의 할아버지의 기록을 간단하게 찾아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뿌리』는 작가의 7대조 할아버지가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와 갖은 박해를 견디며 살아온 모습을 10여 년에 걸친 현지 답사를 통해 사실적으 로 기록한 것이다. 이처럼 족보는 기본적으로 한 성씨의 역사 기록이자 가계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사적인 문서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조상들의 족적을 더듬어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뿌리의식이 이처럼 남달랐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의 많은 인류학자들의 한국의 족보 를 연구한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정작 족보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 은 족보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 개의 혈통은 끔직하리만치 챙기면서 말이다.
--- 족보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민화는 아주 독특하 다. 그 때문에 외국의 전문적인 장사꾼들은 가짜 민화를 싼 값에 구입해 자기네 벼룩시장에 내놓기도 한다는데 외국인들의 눈에는 우리의 민화가 아주 독특한 멋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민화는 실용화다. 애초부 터 실용적인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림을 빨리 그려내는 일이 중요했다. 마치 인쇄하는 것처럼 본을 떠서 여러장의 그림을 그렸는데, 같은 것은 거의 없다. 본은 동일하지만 각 그림마다 담아내는 내용이나 표현기법을 화공마다 달리했기 때문이다. 이름없는 화공이었지만 자신의 재능을 베끼는 데만 사용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민가의 토벽 에 그려져 있던 용이나 호랑이 그림, 벽장이나 병풍에 그려진 화조화 등은 낙관조차 찍히지 않은 것들로 영락한 무명화가나 떠돌이 화공의 작품이었 다. 사실 민화는 서양의 고전적인 정의나 동양적인 그림의 틀로 보아도 화법 이나 화론에 어긋날 뿐 아니라 예술적인 품격도 떨어지고 조잡하고 속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화가 가치있는 것은 한국인의 삶을 잘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한국 민화가 건축의 장식적 인 요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거공간에서 건축물과 사람을 하나로 맺어주는 매체요, 생명체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보기도 했다.
--- 민화
. 인상깊었던 구절
『과학이 있는 우리문화유산』은 우리의 토종 문화유산을 과학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다. 이들 중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것들도 있으며 현대화의 발길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주제들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 모두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p.머리글 중에서
. 인상깊었던 구절
『과학이 있는 우리문화유산』은 우리의 토종 문화유산을 과학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다. 이들 중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것들도 있으며 현대화의 발길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주제들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 모두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p.머리글 중에서
- 개는 못생길수록 가치 있다. 그래서 파리 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못생긴 견공 콘테스트가 열린다고 하는데 여기에 뽑힌 개들은 그 족보의 우수성을 인정받는다고 한다. 족보가 좋다는 뜻은 못생긴 토종개를 계속적으로 전승시켜 대대로 못생긴 개를 배출했다는 의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토종개는 진돗개, 삽살개, 워리, 풍산 개만이 남아 있다. 진돗개는 1938년 일제시대에 이미 천연기념물 53호로 지정, 일찌감치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귀신 쫓는 개로 알려진 삽살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했으나 일제시대에 대수난을 당해 그 수가 대폭 줄었다가 몇몇 사람의 노력에 의해 지난 92년 천연기념물 368호로 지정받 았다. 아무래도 토종개 중 가장 억울한 것은 특별한 명칭없이 '워리'로 불린 누렁이, 일명 똥개가 아닐까 싶다. 보신탕으로 각광받는 똥개는 일제 잡견말살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였으며, 동시에 별다른 특징이 없는 잡견으로 푸대접받아왔다. 사냥에 특출한 능력을 보이는 풍산개나 진돗개 와 달리 귀가 아래로 쳐져 있고, 꼬리도 늘어져 있는데, 류갑현 교수에 따르면 워리의 이러한 신체적 특성이 오히려 사냥개로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또 농작물이나 가축에 해를 끼치지 않고, 귀속성이 매우 강한데도 잡견으로 푸대접을 받고 있어 워리의 명예를 찾아주는 운동이 일고 있을 정도이다.
- 저자가 프랑스에서 유학중일 때 한 프랑스인이 자기 아들이 다쳤으니 침을 놓아달라며 다짜고짜 잡아끌더란다. 그는 동양사람, 특히 한국사람 들은 모두 침을 잘 놓는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침을 전혀 놓을 줄 모르는 저자 를 잡아끌었던 것인데 요즘 서양인들은 조그만 바늘이 보여주는 침술에 아주 매료되어 있다고 한다. 운동을 하다가 다리나 손을 삐었을 때 서양 의사들은 깁스를 해주고 2-3달 치료하는 것이 보통인데 침은 며칠간만 맞으면 감쪽같이 나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동양의학과 서양의 학의 차이점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에 내놓 을 만한 한의학의 3대 보고인 『향약집성방』『의방유취』『동의보감』이 있다. 이중 동의보감은 단연 동양의학의 고전이다. 의술인의 비급으로 알려진 동의보감은 의사들이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편집을 해놓았을 뿐 아니라 당시의 향약과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의학을 통합, 정리해냄으 로써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가장 중요한 의서로 자리잡았다. 청나라에서 동의보감을 번역한 능어는 "지금까지 발간된 의학서들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누구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므로 이를 보급 하는 것은 천하의 보물을 나누어갖는 것"이라고 평했고, 1724년 일본에 서 처음 간행되었을 때는 에도시대 의술인들의 필독서로 유포, 거듭 간행될 정도로 비중있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인의 저서로 동의보감만큼 외국인들 에게 널리 읽혀진 책도 없다.
- 1997년 시사주간지 라이프지는 지난 천년 인류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 로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 성경을 찍어낸 것을 꼽았다. 그러나 그 성경은 발간된 지 500여 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지질 보관에 문제가 있어 열람조차 불가능한 암실에 보관되어있다고 한다. 반면 우리 한지는 어떤가? 천년 세월을 견뎌낸 것은 물론 삭지도, 썩지도 않는다. 그 때문 에 중국에서는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 데는 고려의 종이만 사용했다 는 기록을 볼 수 있으며, 조선조의 기록에도 "우리나라의 종이가 가장 질겨서 방망이로 두드리는 작업을 거치면 더욱 고르고 매끄러웠던 것인 데 다른 나라 종이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하여 일찍부터 한지의 우수성 이 공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닥나무로 만든 한지의 질이 좋았던 것은 독특 한 공정법도 한몫을 했지만 우리 조상들이 처음으로 고안한 종이의 표면가공 기술, 즉 도침도 큰 역할을 했다. 도침은 종이 표면이 치밀해지고 평활도를 향상시키며 광택을 내기 위해 풀칠한 종이를 여러 장씩 겹쳐 놓고 디딜방 아 모양의 도침기로 골고루 내리치는 공정을 말한다. 한지의 강한 특성은 한지를 몇 겹으로 바른 갑옷의 예에서도 볼 수 있다. 옻칠을 입혀 몇겹 의 한지로 만든 갑옷은 화살도 뚫지 못한다고 한다.
--- 토종개, 동의보감, 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