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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폴』로 이미 다수의 국내 팬들을 확보한 앵키 빌랄. 그만의 독특한 주제의식, 화풍이 새로운 이름표를 달고 우리 곁에 다가왔다. 제목은 『야수의 잠』. 이 작품은 '앵키 빌랄표'라는 브랜드 네임이 가지는 고유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한 단계 정화된 시니컬함을 선보인다. 기기묘묘한 현실 세계, 추악한 정치 놀음에 대한 비판 의식은 여전하지만 그 표현 방식이 전작보다는 덜 그로테스크해 보인달까?
우선 저자의 이력을 보자. 체코계 모친과 보스니아계 부친 사이,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평범해 보이진 않는다. 그의 작품을 지배하는 그 일련의 '분노와 저항의 이미지'가 개인, 더 나아가서는 조국의 불분명한 정체성, 그 불행한 기억들에서 유래한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보는데… 실제로 작품 속 주인공은 '당신은 세르비아인인가요, 크로아티아인인가요, 아니면 회교도?' 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 정체성이 불분명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작가는 자신이 묘사하는 역사 왜곡의 장면들을 두고 '역사에 대한 의도적인 불신행위'로 봐달라는 주문을 하기도 한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2026년. 미래사회이긴 하지만 SF 영화,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래사회와는 약간 다른 것이, 상상 속의 미래사회가 아니라 과거를 미래로 옮겨 놓으면서 구성된 미래사회라고 한다. '과거의 미래판'이라고 한다면 적당한 표현일까? 덧붙여 이 작품이 타겟으로 삼은 과거의 시점은 1914년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전쟁.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자면 사라예보 전쟁의 2026년도 판을 보여주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다른 SF 소설, 영화보다도 훨씬 직접적인 현실 비판의 분위기를 띤다. 소재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이 작품을 대면하고 있노라면 최근의 뉴욕 테러 사건부터 시작해 걸프전, 6.25 전쟁 같은, 보고 듣고 배운 익숙한 이름의 전쟁상들이 떠오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얼마나 많은 죽음 뒤에 얼마나 많은 정치, 역사 의식들이 개입되었을까.. 등등. 그리곤 곧 마음이 불편해진다. 작가도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기억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건 자체를 현재 시점으로 그릴 만큼 강한 사람은 못되는지,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미래'라는 가상 공간 안에서 현실을 비판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로 인해 '전쟁과 역사'라는 주제는 흥미진진한 SF 만화의 테두리 안에서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불편함을 제공하고(사실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다시 좀 더 광범위한 주제에 속한 작은 소주제가 되었다. 광범위한 주제라면 '기억'이다. 개인의 기억은 집단의 기억이 되고 집단의 기억은 과거, 현재, 미래를 규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주제 역시 무거운 편에 속하겠다. 그러나 주제를 다루는 방식 만큼은 새롭고 파격적이며 무엇보다도 흥미롭다. 작품에는 '기억'에 대해 양 극단의 태도를 취하는 부류가 등장하는데 한 쪽은 역사와 기억을 혐오하는 몽매주의자의 집단이고 한쪽은 태어난 순간의 기억까지 되살리고자 끊임없이 기억의 여행을 시도하는 인물이다. 두 부류가 기억에 대해 취하는 태도나 가치관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은 '기억의 힘'이다. 인간의 기억이 역사와 인류의 행방을 어디까지 결정지을 수 있는가 하는 두려움 내지는 희망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때로는 멈칫하게 한다. 프랑스 만화 특유의 진지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이 작품은 소위 말하는 '예술 만화'계열에 속한다 할 수 있겠다. 어쩌면 그 '프랑스 만화' 특유의 '우월한 듯한' 분위기에 거부감을 느낄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와 기억에 대한 진지한 사색, 그리고 주제를 담아내는 아름답고 감각적인 회화를 보고 있노라면 아직 우리의 갈 길을 멀다고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뻔하디 뻔한 주제냐, 모방성 짙은 그림체냐.. 이런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작가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는 작품을 놓고 봤을 때 엄청난 차이로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작품에 '기억', 그리고 '역사와 전쟁'이라는 주제를 노출시키는 앵키 빌랄의 집요함이란 분명 멋있는 집착이라 불릴만한 것이겠다. --- 이지영 jylee721@yes24.com |
생각이 납니다...
태어난 지 열여드레째, 병원 천장에 뻥 뚫린 구멍을 통해 밀려들어오는 미지근한 여름 공기와 굵직한 검은 파리들이 생각납니다. 나는 돌풍과 폭풍을 박격포 포격과 T34 포격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 태어난 지 열여드레째, 나는 내가 고아이며 사람들이 나를 나이키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같은 침대 위, 내 왼쪽에서는 하루 늦게 태어난 아미르가 자고 있고 오른쪽에는 겨우 열흘밖에 안되는 막내 레일라가 울어대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고아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고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요. 나는 맏이로서 그들을 언제까지라도 지켜줄 것을 날아가버린 천장 저 위에서 빛나는 별에 두고 맹세합니다. 그렇게 맹세합니다. "그게 다 생각난다는 거예요?" "그렇소" "그렇게 맹세했던 것도 생각나나요?" "물론입니다." "나이키씨는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지난 세기의 운동화 상표인 '나이키'를 신은 채 숨진 어떤 전투원 옆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이키라는 이름이 붙여졌구요... 아트스펠드라는 성은 당신을 발견해서 사라예보의 '코세보' 병원에 맡긴 한 프랑스 기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구요... 그러니까 당신의 나이키 아트스펠드라는 이름은 운동화 상표명과 생판 모르는 어떤 사람의 성을 합쳐서 만들어진 셈이군요. " "나한테는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죠." "자신이 그런 사건들까지 기억해낼 만큼 기억을 깊숙이 파헤칠 수 있다고 믿으세요? 어쩌면 당신이 태어난 바로 그날까지 거슬러올라갈 수도 있을 만큼요?" "기억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곧 17일째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본인의 놀라운 기억력에 대해서 달리 하실 말씀은 없나요?" "덕분에 많은 돈과 끔찍한 두통을 얻었고 또 BCMM 계획에도 크게 기여했지요." |
미래의 모습으로 그리는 현재의 우화
『니코폴』로 국내에 소개된 엥키 빌랄의 신작,『야수의 잠』은 미래가 현재에 보내는 질문을 담고 있다. 전작인 니코폴보다 높은 회화적 완성도를 보이는 이 작품은 SF 형식을 통해 전쟁과 인간, 그리고 '기억'의 이름으로 인간애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2026년 8월 중순, 뉴욕의 상공에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주인공 나이키 아트스펠드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21세기 초 신자유주의 내부에 태동한 마피아와 핵재앙, 신종파와 종교원리주의 부상으로 몽매주의 교단이 전 세계를 위협하게 된다. 몽매주의 교단은 자칭 카리스마적 지도자라 일컫는 세 명의 지도자가 이끄는 강경 과격파로서 사상과 학문, 문화를 주요한 타도대상으로 삼는 집단이다. '백지화' 정책을 앞세운 이들 교단의 리더 중에 하나인 워홀 박사는 체제전복을 시도하며 '독수리 사이트'를 파괴할 음모를 꾸미는데... 이 작품에 나타난 미래사회의 모습은 바로 유고 출신인 빌랄의 개인적 특이성과 연결된 것으로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전쟁을 2026년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대부분의 SF 영화에서 그려지는 유토피아/디스토피아에서 나타나듯 SF 장르의 속성은 현재의 연장선상에 놓인 현실비판의 기능을 지니고 있으며 『야수의 잠』역시 이 같은 현실비판을 시도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에 대해 작가 앵키 빌랄은 '개인적인 불안감뿐만 아니라 현실로부터 물러나고 현실과 단절되고자 하는 욕구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세계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니며 미래를 통해 과거 속으로 현실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야수의 잠』은 무엇보다도 '기억'에 대한 책이다. '기억'은 빌랄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는 개인의 기억, 집단의 기억, 그리고 하나의 기억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교차되는 미묘한 시간의 구성을 보이고 있다. 『야수의 잠』은 교차되는 시공간 사이로 기억과 기억의 주체들을 찾아 떠나는 과정을 담아 냄으로써 일종의 로드 무비식 구성을 보이고 있다. 나이키와 레일라, 아미르, 그들이 만나서 겪게 될 여정을 예고하는 1편은 기억과 시간이 빚어내는 정체성과 존재의 문제,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상념을 진지하게 되새기는 작품이다. 인간, 전쟁, 기억 등의 주제를 풀어내는 앵키 빌랄의 화풍은 두텁고 무게감 있는 색채로 대표되곤 한다. 황량한 미래사회의 정경을 배경으로 그가 보여주는 화면은 유채화와 파스텔을 섞은 듯한 질감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표현되는 바로크적인 작가의 특성은 강약과 농담으로 길게 이어지며 스러지는 선들로 인하여 생동감을 얻게 되며 미묘하게 번지는 색상의 장점을 최대한 이끌어 내고 있다. 감각적인 빌랄의 색채는 책의 첫 장에서 시작되는 노란 택시와 음울한 도시의 모노톤과 대조를 이루게 되며 인물 표현에 있어서도 각 개인의 특성을 부여하는 머리카락을 강렬한 붉은 색과 푸른색으로 표현하여 창백한 얼굴과 묘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전작인 『니코폴』보다 다양한 색채를 선보이는 이번 『야수의 잠』은 회화적이면서 장중한 빌랄의 그림을 느끼기에 좋은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