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이 봉산호를 타다가 납북된 박휘만의 사진-박휘만이 사리원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황주 군병원에서 수수랗는 장면과 환자들과 담소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이 한국에서 나돌고 있는데 이 사진의 입국 경로가 의심스럽다. 이것은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의 전략적 의미를 가진다.
북한의 대남 전략은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된다. 김일성 생존시에 한 교시 내용이다.
"한국에서 포섭할 수 있는 대상은 최대한으로 포섭해야 한다. 태권도 또는 격술 훈련을 받은 사람을 100만 명만 양성해서 한국에 침투시킨다면 적화통일을 쉽게 달성할 수 있고, 또 그들이 한국에 침투하여 태권도 선생을 하면 그 제자들도 모두 빨간색으로 쉽게 물들일 수 있다."
이 모든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한국은 북한에서 파견한 간첩의 소굴이 아닐 수 없다. ○○○○, ○○○, ○○○. ○○○ 같은 조직들 속에도 간첩들이 깊숙이 숨어서 각 조직들의 활동을 조종할 수 있다는 점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천사의 얼굴로 가장한 북의 첩자들은 지금도 대한민국 곳곳에 무서운 독을 뿌리고 있다.
친북 세력들은 북한의 이러한 현실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며,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도 잃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타도의 대상이 되어 결국에는 목숨까지도 잃게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만약에 무엇인가 기대를 하고 북으로 건너가겠다는 한국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금과 같은 북한 독재 체제하에서는 절대 출세와 사랑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정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실지로 북에 가서 평양을 제외한 타지에 가서 한 달만 살아 보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 같은 노동자의 말이라고 해서 소홀히 하면 큰코다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 pp.285-286
1986년 7월 20일.
원산연락소에 갔다 온 지도 어느덧 일 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내게도 입당 준비를 하라는 당비서의 지시가 있어서 학습을 했다. 학습내용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기 위한 10대 원칙'과 조선로동당을 통달하고, 김정일 현지지도를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1986년 10월 27일.
나는 세포당에서 후보당에 들어가는 시험을 치렀다. 군당 회의실에서 군당 조직비서의 사회 아래 입당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조직비서는 전임 조직비서가 덕성군당 책임비서로 떠나고 그 후임으로 온 사람이었다. 나도 시험에 무사히 통과되어 마침내 후보당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후보당증을 받을 때는 조선로동당 당기를 앞에 세워 놓고 선서를 한다.
'본인은 죽는 한이 있어도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해 성새가 되고 방패가 될 것을…(하략).'
만약 1년 간의 후보당 기간 동안 일을 제대로 못하거나 말을 실수하거나 하면 도중 하차하게 된다. 당의 요구대로 살고 당의 의도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정말 힘이 드는 일이다.
--- pp.122-123
1970년 4월 29일. 2시 30분경.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오직 뱃전을 가볍게 두드리는 파도소리뿐이었다. 자정을 넘기면서부터 봉산호는 그물을 끌기 시작했다. 나는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아서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쿵 하는 소리에 이어 어떤 물체가 우리 배에 부딪치는 둔탁한 느낌이 왔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얼른 침대 옆으로 나 있는 둥근 유리창을 통해서 소리 나는 쪽을 내려다보았다. 해군 경비정으로 보이는 배가 우리 뱃전에 몸체를 바짝 붙이더니 군인들이 배에서 황급히 내려 우리 배로 쿵쾅거리며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배의 위치가 휴전선 근방인지라 아마 우리 해군들이 단속을 하려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단잠에 취해 있던 봉산호 선원들은 아직도 잠이 덜 깬 눈으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갈피를 못 잡고 그냥 자리에 드러누운 채로 있었다.
이윽고 봉산호에 뛰어올라온 군인이 총을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너희들, 죽고 싶어? 빨리 내려와!"
그 때서야 정신이 번쩍 든 선원들은 허둥지둥 갑판으로 내려갔다. 그 와중에도 박휘만은 침착하게 귓속말로 내게 넌지시 일렀다.
"형님, 공산군이 분명합니다. 구명대를 가져오겠으니 바다에 뛰어내립시다."
"놈들이 보고 있는데 가능하겠어?"
"기회를 봐서 가져오겠소."
공산군들은 봉산호 선원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윽박질렀다.
"모두 손들엇!"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선원들은 겁에 질려 얼른 두 손을 쳐들었으나 쳐들고 있는 손끝은 하나같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공산군들은 경비정과 봉산호의 선두를 밧줄로 묶어 연결시키더니 앞에서 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봉산호는 그들 뜻대로 잘 움직여 주질 않았다. 그들은 우리 배에 그물이 달린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경비정에서 공산군 한 명이 우리 배로 건너와 마구잡이로 총질을 해대면서 악을 썼다.
"이 새끼들, 어느 놈이 배를 못 가게 제동을 거는 거야? 이 새끼들, 저 뒤로 가지 못하겠어? 죽고 싶어!"
--- pp.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