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성은 탈사회화되고 탈규범화되고 탈인간화되는 위험을 겪고 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의 실체는 기능이기 전에 문화인 것이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예전에 이렇게 썼다. "성은 극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 속에 우리의 개인적 삶 전체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히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자연적 자아, 즉 주어진 존재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를 지탱하는 힘들이 이 자아의 것인지 우리의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그것들이 전적으로 자아의 것이 아닌지도 우리의 것이 아닌지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성 그 자체에 폐쇄된 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도 완전히는 구제되지 않으며, 아무도 완전히는 파멸하지 않는다."
이 철학자의 아름다운 낙관주의로부터 남아 있는 대단한 것은 더 이상 없다. 사실 더 이상 '극적'이지 않은 쾌락의 고독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쾌락은 메를로 퐁티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우리의 개인적 삶을 끌어들이는 것'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공허에 대해 진정으로 숙고하기를 회피한다며는 그것의 말없는 현존 - 그것의 떡벌어진 틈? - 은 섹스가 문제되자마자 근대성의 수다스러운 열기에 낯선 것이 되는 것 같다. 그것은 싸우기 좋아하고 과시적이지만 충족되지 않은 갈망들, 일종의 위로할 수 없는 부재가 괴롭히는 것 같은 그 갈망들을 정당화시킨다. 우리는 우리에게 금지된 것, 즉 구속 없는 쾌락을 마침내 움켜쥐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쾌락이 한줌의 물처럼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고, 우리를 좌절하고 어리둥절한 상태로 남겨 놓고 있다. 과연 우리는 용감하게 해방되었지만, 홀로 있으며 시시한 것이 되고 만 우리 자신의 쾌락에 의해 난처하게 된 것 같다. 이로부터 매일같이 이미지를 쏟아내고 성과를 쏟아내며 그 '해괴한 성적' 가설을 지칠 줄 모르고 탐구하게 된 것이다. 이 가설에 대해 폴 리쾨르는 거의 40년 전에 이야기한 바 있다. 더구나 그는 같은 텍스트에서 어떤 징후를 예감하듯 이렇게 덧붙였다. "이렇게 인간은 쾌락 자체의 심리적인 빈곤에 대항해 기진맥진케 하는 싸움에 끌려 들어갔다. 이 쾌락은 그것이 지닌 생물학적인 난폭성으로 볼 때 완벽이 거의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주변의 담론은 제대로 정의되지 않고, 따라서 그만큼 혼란스러운 성적 '성경'에 대한 상상적 추구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추구는 사랑의 새로운 성배에 대한 상상적 추구이고, 쾌락의 강도에 있어서 오메가 지점에 대해 끊임없이 갱신된 - 그러나 결코 지켜진 적이 없응 - 약속이며, 어디서 올지는 잘 모르지만 다음번의 관능적 성취에 대한 전대미문의 예고인 것이다. 결코 감행된 적이 없는 위반에 대한 예고일까? 테크닉에 대한 예고이까? 다양한 시도나 경험, 보다 나은 성과에 대한 예고일까? 또는 어떤 방법에 대한 예고일까?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것은 쾌락의 궁극적 신비, 천지가 개벽된 이래 불투명하고 도달 불가능한 그 신비가 이번에는 손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모든 미망과 순진함을 은밀히 부추기는 것이다.
실상 우리는 위협적인 도덕 질서와 위협받는 자유 사이의 이른바 결정적인 논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 pp.526-528
가정적인 가치들을 우선시하는 이와 같은 합의는 프랑스에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특별히 정치적인 상황과 연결된 것이 아니다. 전후의 피폐해진 유럽 전체가 만회하려는 엄청난 본능에 따르는 현상인 것 같다. 결혼은 황금 시대를 누리고 있었다. 에블린 쉴르로는 이렇게 주목한다. "유렵 전체가 전적인 결혼의 열병을 앓았따. 물론 전쟁이 치러진 그 몇 년간 많은 가람들이 결혼할 수 없었거나 죽음으로 인해 결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결손을 만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1950년 이후부터 1965년까지의 결혼 지수들은 프랑스·영국·벨기에·네덜란드·스웨덴·독일·덴마크·이탈리아 등에서 모든 기록을 경신했다. 아일랜드에서조차 독신자들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결혼을 했고, 그것도 상당히 일찍이 결혼을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가정의 근대화'라 불렀다."
사실 이와 같은 정신 상태는 유럽의 국경을 넘어서 선진국들 전체와 관련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전쟁 전의 여권주의는 유행이 지나가 버린 것 같았다. 1948년에 공포된 인권 선언까지 이와 같은 분위기를 반영했다. 왜냐하면 그것의 첫째 항이 가정제도를 사회의 근본적 요소로서 환기키시고 있기 때문이다. 60년대초까지, 데이비드 리스먼 같은 저명한 에세이스트들은 '서구 나라들에서 가정주의적인' 감성이 우세를 떨치고 있음을 강조한다.
--- pp.401-402
11세기부터 찬양된 기사도적 사랑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는 덜 정신적이었다. 《투르바두르의 에로틱한 세계》의 저자인 르네 넬리 같은 전문가들의 말을 믿는다면, 반대로 이 사랑은 쾌락적이고 세련되었으며, 말 그대로 에로틱한 코드를 강제했다. 사랑하는 귀부인을 정복하기 전에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 강제된 일련의 시련이 끝나면 플라토닉한 상황이 끝나는 단계가 왔던 것이다. "최고의 보상은 남자의 자제력이 시험을 받는 테스트였다. 그가 기사도적 사랑의 정중함에 불가결한 자기 통제를 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귀부인은 자신의 남자 친구에게 잠자리를 같이하자고 초대한다. 그들은 밤새 나체로 함께 있으며 상호 애무가 허용되지만, '사건'에는 도달하지 않는다. 남자가 유혹에 질 경우, 이것은 그가 충분히 사랑하지 않고 있다느 증거이다. 그는 거부되고 세련된 사랑을 할 만한 자격이 없는 것으로 선언된다. 반대의 경우, 그는 최고로 가치 있는 것을 얻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관능적인 애인으로 변모될 수 있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중세전문가인 아워드 블로크에 의하면, 사람들은 때때로 우화시들을 중세의 보다 정중한 문학 형태들 - 이들 형태들에서 여자들은 이상화되고, 귀부인을 흠모하는 기사들은 기다림의 오랜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 에 대립시키는데, 이는 잘못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사실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두 장르는 공히 에로티시즘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단순히 이 에로티시즘이 다양한 양태와 매우 다른 문학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 pp.366-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