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기혼 농민 여성들의 지원 활동은 여성들 자신의 의식을 촉발시켜, 그들이 직접 투쟁에 뛰어드는 길을 찾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아들이나 남편을 돕기 위해 참여하면서 혹은 아들과 남편의 역할을 떠맡으면서 조선인 기혼 농민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과의 사회적 관계의 영역을 확대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투쟁 속에서 나름대로 경험이 쌓이고 다른 여성들과의 교제 또한 늘어나면서, 여성들은 가족의 재통합이라는 개인적 목적이 여성 모두의 공통된 목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로써 자신들의 시야를 개별 가정이라는 경계 바깥으로까지 넓히게 되었다. 흩어진 가족이 다시 모여 사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은 일제 및 지주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단계의 투쟁에 참여한 기혼 농민 여성들은 더 이상 남편이나 아들의 지시를 받아 활동하는 단순한 동료가 아니었다. 어머니라는 그들의 정체성이 여성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여성 연대의 기초가 되었지만, 자신의 가족만이 그 정체성과 힘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보여준 책임 의식은 개별적인 가족 관계를 뛰어넘어 있었다.
더욱 깊어진 유대감은 여성위원회의 구성와 활동에서 나타난다. 여성위원회는 농작물을 생산한다든지, 게릴라 부대에 식량, 의복 및 기타 필수품을 조달한다든지, 정찰대를 안내한다든지 하는 여러 임무를 수행하였다. 상당수 남성 가장들이 게릴라 부대에 합류하거나 여타 비밀 활동에 가담한 뒤로는 여성들이 농작물을 심고 추수하고 탈곡하는 일까지 책임 져야 했다. 위원회는 또 농민 여성을 위한 야학도 운영하였다. 여성들은 혁명 및 조선의 민족 해방 원칙에 입각해 읽고 쓰기를 배웠다. 여성위원회의 또 하나 중요한 업적은 아동 부대를 조직하고 훈련시킨 일이었다. 아동 부대에 소속된 아이들은 게릴라 부대의 여흥과 사기를 북돋기 위해 가무를 공연하는 것은 물론, 보초 서기, 중국 공산당 만주위원회의 예하 주직에 서신 전달하기 등의 일을 맡아 하였다. 한 집단은 약 20여 명의 아이들로 조직되었으며, 그 대부분은 부모나 여타 가족을 잃은 아이들이었다.
--- pp.294-295
"기지촌은 일종의 '뻘'과 같다. 왜냐하면 한번 빠지면 대개 헤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성 노동자들은 그 동안에도 여러 번 정치적인 항의를 하긴 했지만 대중으로부터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언급할 만할 몇 번의 의미 있는 집단 행동이 이루어졌다. 1971년 5월에 김연자 씨를 비롯한 많은 성 노동자들이 송탄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미국 군인들이 "구두 한 켤레에 5달러, 숏 타임 5달러, 롱 타임 10달러"라고 씌어진 유인물을 돌린 것이 그 발단이었다. 유인물의 내용은 여성의 몸을 갖가지 한국 상품과 동격에 놓으면서 화대를 내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김연자 씨는 천 명이 넘는 성 노동자를 동원하여 기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여성들은 "우리가 신발값과 같은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이다!"라며, 유인물을 돌린 군인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여성들의 요구는 무시되었으며, 시위대는 한국 경찰과 미 헌병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1977년 6월 군산의 기지촌에서 이복희라는 성 노동자가 목 졸려 숨지고 시신이 불태워진 사건이 일어났다. 한 달 뒤 이영순이라는 또 다른 성 노동자가 살해되었다. 스티븐 워런 타워맨이라는 미국인 병사가 두 여인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국 경찰이나 미 헌병 어느 측에서도 살해 사건을 조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 경찰은 '증거 불충분'이라며 사건을 은폐하였다. 그때는 어떤 운동가도 이들 성 노동자들을 민족의 상징으로 끌어올리고자 나서지 않았다. 단지 김연자 씨가 몇몇 성 노동자들과 함께 한국과 미 헌병의 무관심과 냉담함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을 뿐이었다.
--- pp.243-244
"기지촌은 일종의 '뻘'과 같다. 왜냐하면 한번 빠지면 대개 헤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성 노동자들은 그 동안에도 여러 번 정치적인 항의를 하긴 했지만 대중으로부터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언급할 만할 몇 번의 의미 있는 집단 행동이 이루어졌다. 1971년 5월에 김연자 씨를 비롯한 많은 성 노동자들이 송탄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미국 군인들이 "구두 한 켤레에 5달러, 숏 타임 5달러, 롱 타임 10달러"라고 씌어진 유인물을 돌린 것이 그 발단이었다. 유인물의 내용은 여성의 몸을 갖가지 한국 상품과 동격에 놓으면서 화대를 내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김연자 씨는 천 명이 넘는 성 노동자를 동원하여 기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여성들은 "우리가 신발값과 같은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이다!"라며, 유인물을 돌린 군인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여성들의 요구는 무시되었으며, 시위대는 한국 경찰과 미 헌병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1977년 6월 군산의 기지촌에서 이복희라는 성 노동자가 목 졸려 숨지고 시신이 불태워진 사건이 일어났다. 한 달 뒤 이영순이라는 또 다른 성 노동자가 살해되었다. 스티븐 워런 타워맨이라는 미국인 병사가 두 여인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국 경찰이나 미 헌병 어느 측에서도 살해 사건을 조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 경찰은 '증거 불충분'이라며 사건을 은폐하였다. 그때는 어떤 운동가도 이들 성 노동자들을 민족의 상징으로 끌어올리고자 나서지 않았다. 단지 김연자 씨가 몇몇 성 노동자들과 함께 한국과 미 헌병의 무관심과 냉담함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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