諸佛與一切衆生(제불여일체중생)이 唯是一心(유시일심)이오 更無別法(갱무별법)이니라
모든 부처님과 일체중생이 오직 한마음이요, 다시 다른 법은 없느니라.
[전심법요]의 대지가 ‘유전일심 갱무별법’이라 했지요. 여긴 ‘유시일심 갱무별법(唯是一心 更無別法)’이라 했는데 같은 뜻입니다. 오직 이 한마음이에요. 부처가 됐든지, 중생이 됐든지, 남자 여자, 동양 사람 서양 사람, 옛날 사람 지금 사람, 늙은 사람 젊은 사람, 유식한 사람 무식한 사람, 몸이 성한 사람 성치 못한 사람, 그 어떤 사람이든 ‘유시일심 갱무별법’입니다. 오직 한마음뿐입니다. 사람일 뿐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 속에 마음도 포함되어 있고, 몸도 포함되어 있고, 일체가 포함되어 있어요.
--- p.43~44
超過一切限量名言縱跡對待(초과일체한량명언종적대대)하야 當體便是(당체변시)라
일체 한계와 분량, 이름과 말, 종적과 상대성을 뛰어넘어야, 그 당체가 곧 마음이다.
마음은 궤도처럼 정해진 대로 가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 변했다고 그러지요. 그런데 변하게 되어 있는 것이 마음이고 사람입니다. 그 변화에 늦고 빠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또 변해야 합니다. 그것이 발전이거든요. 잘못 변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변하게 될 것이 마음이라면 좋은 방향으로 변해야 합니다.
--- p.51
唯此一心(유차일심)이 卽是佛(즉시불)이니 佛與衆生(불여중생)이 更無別異(갱무별이)어늘
但是衆生(단시중생)이 著相外求(착상외구)하야 求之轉失(구지전실)이로다
오직 이 한마음이 곧 부처이니, 부처와 중생이 다시 다른 것이 아니거늘, 다만 중생이 상에 집착해서 밖으로 구하므로 구할수록 더욱 멀어진다.
한마음으로 보고 듣고 쓰고, 덥다 춥다 시원하다를 분별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면 성공이잖아요. 이보다 더 큰 무엇을 얻을 것이 있나요?
그런데 그만 소소한 일에 목을 매는 거예요. 부처라는 대의명분이 있는데도 그것은 뒷전이고, 몇 푼어치 안되는 것에 목을 매어 죽느니 사느니,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니 합니다. 그러다가도 공부 좀 한 사람은 부처끼리 너무 그러지 말자는 한마디 하면 끝납니다. 그때 한번 돌이켜 보면 좋은 방편이 되는 거예요. 마음이 싹 사그라지는 거죠. 이렇게 마음 쓰는 이 능력 이대로가 보물이며, 바로 부처입니다. 달리 다른 곳에 부처가 있지 않습니다. 이렇듯 쉽고 간단한데 부처도 아닌 곳에 가서 부처라고 예배하며 속아 넘어갑니다.
--- p.53~54
물에는 바닷물, 개울물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물이라는 성질은 똑같습니다. 그것이 일심입니다. 남자의 모습, 여자의 모습 등 외형은 각각 달라도 일심 자리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거죠. 부처, 중생도 차별이 없는데 빈부귀천이 어디 있고, 남녀노소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 허공과 같습니다. 허공에 분별이 있나요?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일체 차별 이 없는 거죠. 또한 허공은 아무리 많은 건물을 짓거나, 차와 비행기가 지나다니거나, 설령 미사일을 쏘아 올려도 섞이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마치 태양이 동서남북 온 천하를 환하게 비추듯 허공은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인데 사람이 괜히 그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 p.71
供養十方諸佛(공양시방제불)이 不如供養一個無心道人(불여공양일개무심도인)이니
何故(하고)오 無心者(무심자)는 無一切心也(무일체심야)라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 한 사람의 무심도인에게 올리는 공양만 같지 못하니, 왜냐하면 무심자에게는 일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
‘일체심一切心’은 시비, 선악, 진위 등의 망상과 분별을 뜻합니다. 무심도인에게는 그러한 마음이 없다는 거죠. 그대로 존재의 원리에 부합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많은 이들은 자신만의 잣대를 가지고 그것이 옳다 그르다 계산하죠. 잣대의 평가와 기준도 믿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잣대를 절대시하여 시비 분별을 일으키고, 지나치면 고통이 생기지요. 무심도인에게는 그러한 마음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 p.84~85
물결은 바람에 의해 여러 모양으로 출렁이지만 그 젖는 성품은 변함이 없습니다. 흐린 물이든 맑은 물이든, 출렁거리는 물이든 고요한 물이든, 심지어 얼어 있는 물이라도 녹으면 그 역시 젖는 성품은 여여해요. 그것을 보라는 겁니다. 마음도 그렇습니다. 온갖 선악, 희비, 호불호, 고저장단 등의 마음 씀씀이를 활용하고 있지만 그 마음은 분별심이 전혀 없고 한결같아 여여하죠.
--- p.85~86
衆生諸佛(중생제불)이 更無差別(갱무차별)이니 但能無心(단능무심)하면 便是究竟(변시구경)이니라
중생과 부처님이 다시 차별이 없으니, 다만 능히 무심해질 것 같으면 그것이 최상의 경지이다.
본래 마음의 이치는 중생과 부처라는 차별이 전혀 없습니다. 특히 경계에 꺼들려 상 내는 마음 없이 무심하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겁니다.
--- p.101
어떠한 분별도 없는 마음 자리에 턱 하니 던져 놓고 차별상에 꺼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안주하라는 겁니다. 누가 어떻게 했느니 등에 꺼들리어 한눈팔지 않고 살면 그 자리는 텅 비고 다 통해 있다는 거죠. 때로는 화두를 들지 않은 채 좌선이 필요한 것도 아무런 망상 없이 텅 빈 마음 자리에 놔두기 위함입니다. 스스로를 텅 빈 마음 자리에 그냥 놔두는 것이 아주 중요해요.
--- p.121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느 곳에서든지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된 행복이다.’라는 임제 스님의 유명한 말이 있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 주체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 부처라는 것,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 것만 제대로 챙기면 어디에 있든지 진정한 삶을 누리고 행복할 수 있는 겁니다.
--- p.136
八萬四千法門(팔만사천법문)은 對八萬四千煩惱(대팔만사천번뇌)니
팔만사천법문은 팔만사천 번뇌를 치료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경전과 어록을 공부할 때 인간의 이러저러한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한 것으로 알면 종지를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팔만사천의 법문은 인간이 앓고 있는 번뇌의 병, 마음의 병이 팔만사천 가지라는 것이며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168
離卽是法(이즉시법)이요 知離者是佛(지리자시불)이니라
여의는 것이 곧 법이요, 여읠 줄 아는 이가 곧 부처다.
번뇌의 병을 앓고 있다면 그 병을 떠나는 것이 최상이며 그것 그대로가 법입니다. 병을 떠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할 수 있습니다. 주먹으로 후려치든지, 기도를 하든지, 목욕을 하든지, 약을 먹든지, 운동을 하든지 아니면 더 재미있는 데서 정신없이 놀든지 간에 번뇌의 병을 떠나면 그게 법입니다.
--- p.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