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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10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352쪽 | 140*210*30mm
ISBN13 9788927415121
ISBN10 892741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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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이치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희망에 차 있는 동안은 그것이 어떤 희망이건, 확실하게 매달리면 된다. 그때 문득 어린아이의 웃는 얼굴에 네모난 구덩이에 누워 있는 젊은 남자의 데스마스크가 포개졌다. 피투성이가 된 입술과 깨지고 흙 범벅이 된 앞니. 너무 강렬한 이미지에 준이치가 주눅이 들자, 남자아이에게도 그 충격이 전해진 것 같았다. 부목을 댄 다리로 서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타일 바닥을 짚은 작은 손이 눈앞에 보였다.
이 아이는 아직 모른다.
미래를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 p.34

“준지로 님의 전달 사항입니다. 준이치 씨는 장남입니다만, 가케이 그룹의 상속권을 일절 포기해 달라고, 아버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소리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준이치 씨에게는 대학을 졸업해도 가케이 그룹 관련 회사 입사를 허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에 하나 아버님이 돌아가셔도 가케이 그룹 및 준지로 님 개인 자산 상속권은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대신 …….”
“아들과 절연하는데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네, 대신 상속권 포기 각서에 사인하시면, 10억 엔의 신탁기금이 준이치 씨의 것이 됩니다. 대학 졸업 때까지는 제가 관리하겠습니다만, 졸업 후에는 마음대로 사용하셔도 됩니다.” --- p.55-56

“연습에 몰두해 있는 동안에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내가 왜 죽었는지 그 진상만큼은 확실히 파헤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까 …….”
고구레 히데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 가지 조언할 게 있습니다. 오지랖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몰라도 되는 것은 모르는 게 좋을 수도 있다, 그것만큼은 잊지 말아 주세요. 모르는 채 있는 것이 행복일 수도 있으니까요.”
“어려운 이야기군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아는 것은 일방통행입니다. 어떤 사실을 알아 버리면, 모르는 상태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어요. 죽음의 수수께끼를 쫓다 보면 앞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편이 좋아요. 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 p.104

바이탈 사인을 모니터하던 간호사의 목소리가 수술실에 울렸다.
“혈압 저하. 백십~육십 …… 백~육십 …… 구십~오십 …….”
집도를 한 의사들 사이에 긴박한 시선이 오갔다.
“혈압이 더 떨어지고 있습니다. 팔십~오십 …… 칠십~사십 …….”
…… 고구레 히데오의 목소리에 준이치는 수술대에 누워 있는 소년을 보았다. 파란 천으로 덮인 소년의 배 위에는 한층 커진 칠흑의 구슬이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흙탕물 속의 거품 같은 알갱이가 표면에 무수히 떠올랐다가 깨지면 한순간 열린 구멍으로 주위의 빛을 빨아들였다. 빛을 삼킬 때마다 그 검은 구슬은 커지는 것 같았다. 준이치는 왠지 그 구슬이 주위 모든 것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 p.163-164

“후미오, 미안하지만, 이따 좀 남아. 할 얘기가 있어.”
기도사키 와타루는 두 손을 머리 뒤로 포개고, 쭉 뻗은 다리를 소파에서 꼬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후미오는 프로듀서 정면에 앉았다.
…… 후미오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랬군. 죽어도 말하기 싫은가 보네. 하지만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용서하지 않을 텐데. 앞으로 『소동』 홍보로 너희는 언론 취재가 엄청나게 들어올 거야. 이하라도 곤란할걸. 너, 이하라하고는 사귀지 않았지? 그렇지?”
준이치는 숨을 죽이고 후미오의 입가를 바라보았다.
“몇 번 같이 식사를 했을 뿐이에요.”
“정말로 그것뿐이야? 식사에 덤은 없었어?”
후미오는 끄덕였다. 준이치는 너무 기쁜 나머지 날아오를 것 같았다. --- p.202-203

여성을 온 힘으로 지키는 하루하루는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뿌듯한 충실감을 주었다. 그 충실감은 일찍이 살아 있을 때, 고독으로 지상을 기어 다니고 일만 하던 일상에서는 절대 얻지 못했던 것이었다. 준이치는 생과 사의 신기한 역전 현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죽은 지금에야 비로소 마음껏 살고 있다.
이 세계에서 죽은 이로 존재하는 것은 준이치에게 그리 나쁘지 않았다.
더욱더 살고 싶었다. 정확하게는 더 죽어 있고 싶었다.
죽음 속 ‘생’의 달콤함을 느끼고 싶었다. …… 따듯한 바람에 온몸을 감싼 채, 준이치는 눈 아래 가로등을 바라보면서 사후의 생이 한없이 계속되기를 조심스럽게 바랐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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