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낙선하던 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더 당황스러운 일은 다음날 일어났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오르막길을 올라 광주 동산초등학교에 도착했는데 학교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어 있었다. 선생님도 아이들도 모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확실히 광주는 내가 그때까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어떤 동화책에서도 보지 못한 낯선 세계였다. 선거 결과가 최종 발표된 12월 17일 아침,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광주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오직 나 혼자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1996년 여름, 내가 닮고 싶었던 선배와 동기들은 대부분 구속되거나 수배자가 되었다. 그들이 서울 신촌 바닥에서 빨갱이로 몰리던 8월, 나는 동네 도서관을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당구를 치고 술을 마시고 그래도 남아도는 시간을 하릴없이 보냈다. 내가 다시 학교에 간 것은 전쟁터가 된 신촌 풍경을 뉴스를 통해 보고나서였다. 신촌역을 나서자마자 경찰 네 명이 나를 에워쌌다. 신분증을 제출해야 했고, 몸수색을 받아야 했고, 가방에 있는 모든 것을 꺼내 역 한 가운데에 전시해야 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라는 단 한마디 반항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그들의 명령에 순응했다. 겁을 먹고 있었고, 그들의 심문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으며, 책을 반납하기 위해 도서관에 간다는 거짓말이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나를 둘러싼 경찰들 위에 두 대의 헬리콥터가 낮게 날고 있었고, 최루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2001년 여름,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 브리스번으로 떠났다. 이전의 삶과 단절이 필요했다. 내가 호주에서 만난 친구들은 파키스탄, 팔레스타인, 나이지리아 난민, 베트남 보트 피플, 위장 결혼한 불법체류자, 일본 프리터족, 성적 소수자, 호주 소수민족, 노인 등 한마디로 그 도시 소수자들이었다. 그 땅의 철저한 변방에서 나는 꽤 깊은 동질감과 편안함을 느꼈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팀, 내가 이 세상에 돌직구를 던져 18승을 따내고 싶은 리그는 바로 이 변방에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내 홈그라운드는 결국 그늘지고 소외된 공간이 아닐까?’
결혼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 관계는 엉망이 되었다. 사랑에 수동적이었던 내게 갈등 국면은 오직 회피하고 싶은 어떤 것이었다. 그녀에게 작은 실수를 할 때마다 나는 갈등을 해결하려기보다 도망칠 궁리만 했다. 그녀가 화를 내면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고, 잠에서 깨면 그녀의 무서운 표정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몰래 도망쳤다. 첫사랑이 영원한 사랑이 되길 꿈꾸던 그녀의 욕망은 비루한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 사랑에 늘 뒷걸음치던 내 일상은 매일이 전쟁터 같았다. 사랑이라는 허상으로 꾸며진 신혼집은 공포의 공간으로 변했다. 공포의 공간에서 우리는 악마로 변해가고 있었다.
입사한 후 일상이 분주해질수록 나는 누군가의 평가에 과도하게 민감해졌다. 그들의 표정을 보면서 주눅 들거나 기뻐했으며, 그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일과 관계에 둘러싸인 내 일상에 거절이란 없었다. 능력 있고, 유쾌하고,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표현하면서 그렇게 견고해져갔다. 그런 행동과 감정의 이면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이유를 모르는 채, 인정받지 못한다면 실패한 삶이라 생각했다. 칭찬받지 못하면 아버지처럼 변방으로 밀려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몸에 각인된 전라도의 흔적은 소외되고, 차별받고, 배제된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저는 전라도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쫓기고 불안해하며 살아온 삶도, 아버지의 삶에서 내 삶으로, 내 십 대로부터 삼십 대까지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되었다. 그 반복에는 변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모습들이 함께했다. 한국전쟁, 군사 독재, 남북 대치, 간첩, 광주민주화항쟁, 빨갱이, 최루탄, 변사체, 한총련, IMF, 신자유주의,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노동자 탄압……. 내 삶은 이 모든 풍경에 종속되어 있었다. 종속이 심화되면서 불안, 죄책감, 두려움은 점점 심해졌다.
전라도는 아버지에게 부정하고 싶은 공간이었고 아들인 내게는 도망치고 싶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도 아들도 어쩔 수 없는 전라도 태생이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놀림 받고 차별 당했다. 조롱과 차별의 벽은 탄탄했고 나도 아버지도 그 벽에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프란츠 파농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것은 주체성과 능동성이 결여된 식민지 주민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의문도 들었다. 전라도를 배경으로 한 나는 스스로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비난하며 언제나 그들의 시선을 의식했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자신을 비하하고 자책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사회적 모순과 차별을 인정하면서 자발적으로 열등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얼마간 과도한 해석 같지만, 파농의 책을 들고 귀가하던 날 나는 한국의 니그로라는 느낌을 받았다.
해고 통지를 받던 날, 서울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한강변을 무작정 걸었다. 라면과 음료수를 파는 작은 매점들을 지나쳤고, 돗자리 위에서 통닭을 먹는 가족, 연인들을 지나쳤다. 멀리 63빌딩이 보였고, 노량진이 보였고, 빼곡하게 자리 잡은 아파트들이 보였다. 한강의 풍경 위에 분노와 슬픔의 색깔이 강하게 결합되어 보였다. 전날 달렸던 한강공원과 그날 걷는 한강공원은 변한 게 없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은 크게 달랐다. 나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한참 울었다. 스스로 가련하고 무가치하다는 느낌에 빠져들게 하는 데는 서울 공간에 펼쳐지는 풍경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내 마음 속 불안과 슬픔을 이해하는 순간부터 사는 게 그다지 힘들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침잠하기보다는 세상의 문들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함께 공부를 시작했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길을 걸었다. 자주 도서관에 갔고 한적한 카페에서 글을 썼다. 틈이 나면 한강변을 달렸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바람의 결을 느꼈다. 나는 조금씩 여유로운 인간으로 변해갔다. 삶에 여백이 생기면서 주변 사람과 풍경들이 내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아파하고 분노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게 됐고, 그들이 울고 있는 공간으로부터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바로 또 다른 나였기 때문이다. 눈물도 많아지고 웃음도 많아졌다. 또 다른 수많은 윤들과 함께 가는 길이 무엇일까 고민도 시작했고, 그들의 공간에 함께 머무는 시간도 늘어났다. 그렇게 나는 과거와는 다른 인간으로 변신하는 중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