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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의 글
1장 쇼팽 노트 2장 앙드레 지드의 일기 3장 쇼팽 노트에 관한 단문들 해설 _ 쇼팽, 바로크적 낭만주의자? 찾아보기 |
Andr-Paul-Guillaume Gide,앙드레 폴 기욤 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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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중에 가장 순수한 음악이죠.”
“가장 순수한 음악.” 바로 이것이다. 내가 감히 입 밖에 내어 말하지 못한 표현, 그토록 연세 높고 중요한 인물인 종교계 원로가 지닌 일체의 권위로부터 보호하려고 내가 마음 쓰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놀라운 표현, 그러나 콘서트에서 연주자들이 우리에게 연주해 보이는 그 현란하고 세속적인 것이 쇼팽의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것이다. --- p.9 쇼팽은 최초로, 웅변적으로 전개되는 음악을 일절 배제했다. 쇼팽의 관심사는 한계를 줄이고 여러 표현 방법들 중에 꼭 필요한 것만 택하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다. 예컨대 쇼팽은 바그너 식으로 자신의 감정에 음을 싣지 않고 음 하나하나에 감정을 실었으며, 심지어 ‘책임감을 실었다’고까지 나는 말하고 싶다. --- p.10 슈만은 시인이다. 쇼팽은 ‘예술가’다. 시인과 예술가는 전혀 다르다. --- p.14 쇼팽은 쇼팽 연주자들이 알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더 알려지지 않았다. 바흐, 스카를라티, 베토벤, 슈만, 리스트, 포레의 곡은 연주를 잘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다. 이들의 외양을 좀 서툴게 전달하더라도 그 의미는 왜곡되지 않는다. 그러나 쇼팽만은 연주자가 배반할 수 있고 깊이, 내밀하게, 또 온전히 변질시킬 수 있는 작곡가다. --- p.14 피아노 치는 쇼팽은 늘 즉흥 연주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조금씩 조금씩 탐색하고, 지어내고, 발견해가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 p.16 나는 쇼팽의 이 음악이 우리에게 들릴 때 거의 언제나 작은 소리로, 거의 나지막한 소리로 아무런 현란한 광채 없이(물론 난 여기서 과감한 몇몇 곡들은 제외한다. 제외된 곡들의 대부분은 스케르초, 폴로네즈들이다), 기교파 명연주가들 특유의 참아줄 수 없는 자신감 - 곡의 더없이 각별한 매력을 제거해버리는 그 자신감 - 없이 들리는 것이 좋은데, 그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쇼팽 본인도 그렇게 연주하더라”라고 그의 연주를 들어본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 p.18 쇼팽은 제안하고, 가정하고, 넌지시 말을 건네고, 유혹하고, 설득한다. 그가 딱 잘라 말하는 일은 거의 없다. --- p.18 너무도 능수능란한 기교적 연주의 달인이라는 면모를 통해서만 쇼팽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눈부신 효과를 뽐내는 현란한 곡들을 작곡한 사람이 쇼팽이려니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싫다. 비록 내가 실제로 직접 쇼팽에게 물어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또 쇼팽이 내게 나지막한 소리로 “저런 곡들은 듣지 마세요. 저런 곡들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곡들 때문에 이 지경이 된 제가 당신보다 훨씬 더 괴롭답니다. 사람들에게 본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비치느니, 차라리 아예 아무도 몰라주는 존재인 편이 낫겠어요”라고 말할 수야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 p.19 사람들은 쇼팽의 작품들을 가리켜 ‘불건전한 음악’이라고 말하곤 했다. [악의 꽃]에 대해서는 ‘불건전한 시’라고 했는데, 전자와 후자를 불건전하다고 한 것은 분명 이유가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쇼팽이나 보들레르나 완벽에 대한 강박을 똑같이 지니고 있었으며, 수사법, 미사여구, 웅변조의 전개 같은 것을 무척 싫어했다는 점이 꼭 같다. 그러나 특히 내가 말하고 싶은 사실은 쇼팽에게서나 보들레르에게서나 서프라이즈(깜짝 놀라게 하는 부분)를 사용한 점이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서프라이즈를 얻을 때까지 비범한 응축된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 p.20 쇼팽의 음악적 제안은 얼마나 단순한가! 이 점에서는 그 이전의 어떤 다른 음악가가 한 일과도 비할 수가 없다. 쇼팽 이전의 음악가들(그중 바흐는 제외하고)은 시인처럼 하나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일단 출발해놓고 뒤이어 그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찾는 시인처럼. 이와 정반대로 단어에서, 구절에서 시작하는 발레리의 방식처럼, 쇼팽은 완벽한 예술가로서 음표에서 출발한다(쇼팽이 ‘즉흥적으로 작곡한다’는 말이 나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쇼팽이 발레리보다 한 수 위인 것이, 그는 즉시 이 매우 단순한 자료인 음표에 매우 인간적인 감정을 침투시켜 그것을 웅장함으로까지 확장한다. --- p.23 바흐를 잘 치려면 영악한 꾀가 그리 필요 없다. 그런데 쇼팽의 경우는 다르다. 쇼팽을 잘 치려면 ‘저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천상 예술가야’라는 말에 해당하지 않는 음악가라면 지닐 수 없을 듯한 특별한 이해가 필요하다. 내가 말하면서도 이 말의 의미를 난 아주 잘 안다. 그런 말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은 ‘환상적’이라는 것의 어떤 의미 - 쇼팽뿐만 아니라 보들레르와도 합치하는 그런 의미까지 -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 p.96 폴 발레리 부부 댁에서 그토록 정겨운 점심식사를 하면서 나디아 불랑제(브뤼노 몽생종과의 대담집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포노, 2013)가 국내에 출간되어 있다 옮긴이)의 의견이 ‘쇼팽 전주곡’의 연주에 관한 내 생각과, 그리고 내가 ‘쇼팽 노트’에서 그것에 대해 쓴 글(그 글이 매우 미진해서 아쉽다!)과 완벽히 같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기쁘던지! --- p.105 완벽한 예술은 우선 그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예술이다. 그런 예술만이 무한하다. --- p.123 베토벤, 심지어 슈만 곡들을 건반 대신 냄비에 대고 쳐보라. 그래도 여전히 그 곡들은 평범치 않은 그 무엇일 것이다. 쇼팽 곡은 빼어난 피아노로만 연주하라. 왜냐하면 쇼팽 곡은 군더더기를 가져오는 법이 절대 없기 때문이다. 쇼팽 곡은 모든 것을 갖춰야 그 자체로서 충족되기 때문이다. 쇼팽 곡이 자기 자신이 될 때는 완벽한 상태로만 그렇게 된다. --- p.124 쇼팽의 가장 짧은 곡들 중 어떤 것들은 문제를 푸는 데에 필요한, 그리고 순수한 이 아름다움을 지녔다. 예술에서 문제를 제대로 제기한다는 것은 바로 그 문제를 푸는 일이나 다름없다. --- p.124 |
쇼팽, 가장 순수한 음악
“음악 중에 가장 순수한 음악” 지드는 몬테 카시노 수도원장 신부의 입을 빌려 쇼팽의 음악을 이렇게 정의한다. 바그너의 ‘종합예술론’의 위광에 짓눌린 20세기 초의 예술인들 앞에서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자칫 가녀리고 감상적인 음악으로 오해받기 쉬운 쇼팽의 음악이 얼마나 높은 가치를 담고 있으며, 그 안에서 ‘게르만적 정신’과 구별되는 ‘프랑스적 정신’이 얼마나 찬란하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차근차근 일러준다. 그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 구현되었던 프랑스 정신을 마찬가지로 쇼팽의 작품들에게 발견하며, 발레리의 단어를 들어 쇼팽의 음표를 설명한다. 그는 ‘완벽한 확신’을 가지고 엄청난 속도로 곡을 연주할 수 있는 명연주자들 앞에서 쇼팽의 곡에 담긴 섬세한 정서들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질식된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지적한다. 일기에는 과도한 기교에 대한 이런 지적이 자칫 자신의 부족한 피아노 연주 실력 때문으로 오해받을까 고민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드러낸다. ‘거장이 만난 거장’ 시리즈 《쇼팽 노트 _ 가장 순수한 음악》은 음악전문출판사 포노가 선보이는 ‘거장이 만난 거장’ 시리즈의 첫 번째 권입니다. 이따금 얄궂은 예외도 없지 않지만, 대개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 제목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등대’와 같이 등장했던 한 거장이 다른 거장을 만나 그를 통해 어떻게 세계와 예술을 이해했는지 직접 그 거장의 글로 만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