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6/9 고흥준(coju@hitel.net)
이문열의 소설에 대한 독후감을 쓰기란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한 평론집, 혹은 평론의 형태를 띤 -무작정적인 비판이나, 무조건적인 미화의 과정을 거친- 모호하고 때로는 격정적인 성격의 글들이 이 세상에는 숱하게 발표되어 그물코처럼 촘촘히 짜여 있기 때문에 그 사이를 뚫고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서점에서 대충 훑어본 바로도 김욱동, 류철균, 이남호 등에 의해 각기 한 장정의 책으로 등장했고, 그외에도 여러 사람들의 글을 모아 만든 '이문열 論'이라는 책을 포함해서 '문학앨범'이라는 형식의 의아함까지 더해졌으니 그 시장통의 부산스러움이야 새삼 말해 무엇하랴. 그렇다면 도대체 그의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작가 자신조차 의문을 가질 법한 '소설 이문열'을 쓰게 만드는 것일까?
그 자신이 말하듯 참 오랜만에 발표한 중단편집이 바로 <아우와의 만남>이다. 이 '오랜만'이라는 수식 뒤에는 한 시대를 관통했던 작가 자신의 교묘한 자만이 숨어있다. 때를 못맞춰 성공하지 못했던 숱한 무명의 작가들과 비교한다면 그 시기를 스스로 맞출 수도 있다는 자신감. 더구나 그의 서문 속에서 매번 반복되기 마련인 스스로에 대한 질타는 세상에 대한 겸손이라기보다 이미 한 성과물을 획득한 자의 여유인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은 대학 교수인 주인공이 북에 남은 이복 동생을 만난다는 단순한 줄거리를 택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는 통일과 관련된 여러 사람들의 주장을 객관적 관점에서 토로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족사에 얽힌 애증의 곡선을 추적하기도 한다. 그 곡선의 시작은 분명 '영웅시대'나, '변경'에 닿아있음이 분명하다.
이 소설이 발표된 시기가 1994년 여름이라고 하니까, 당시에 불거져 나왔던 '통일 문제'를 재빨리 수용하여 형상화한 셈인데 그런 순발력에 비해 그가 제시한 통일론의 여러 모습들은 대체로 극단적이거나 무모한 데가 있다. 그것은 마치 정계와 학계가 서로 왈가왈부식 논쟁을 거치던 분기점으로부터 자유로이 경계를 넘나들며 객관적인 눈을 견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봐야 통일의 문제는 현실적 이론이나 핏줄이 섞인 감정의 어느쪽이든 -그것이 설혹 잘 조화된 경우라도- 결국은 닥쳐봐야 안다'는 식의 냉소에 가깝다. 그것은 혹시 '영웅시대'나 '변경'에서 작가가 누누이 억울함이 깃든 목소리로 호소하던 주변인으로서의 입장이 아닐까? 다시 말해 그 시절에는 결국 주류가 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 소외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난 인물형의 재창출.
<아우와의 만남>은 그가 '미로일지'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아주 잘 꾸며진 한 편의 이야기다. 조금 긴 단편으로 끝냈어야 했을 것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꾸려넣기 위해 억지로 중편으로 만들다 보니 조금은 절정의 흐름이 끊어지기도 하지만 이문열이라는 거장이 지닌 송곳이 여전히 날카롭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수작이다. 몇몇의 거슬리는 표현들 -유교적 회고주의에 휩싸인 아나크로니스트의 불우한 회고적 형식, 혹은 서둘러 감격적인 화해를 이끌어내는 것에 대한 독자의 지레짐작적인 쓴웃음조차도 그의 강건하고 설득력있는 문체를 누추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으며, 입방아 놀리기에 좋아하는 세인들의 성급한 우려처럼 몰락의 징후 또한 감지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뛰어난 문장과 이야기 거리를 지니고 한국 문단사에 큰 자리를 차지할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자꾸 읽을 수록 정체를 섣불리 진단하기 힘들어지는 이 허탈은 무엇일까. 우연히 옛사랑의 소녀를 만나 그녀의 눈언저리에 쌓인 세월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처럼, 가슴을 저미게 하는 쓸쓸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덕적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외롭고 불우한 그녀의 손을 잡아주지 못하는 늙은 정신의 세계....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면 이 또한 한 '거인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아쉬워하는 회고주의자의 푸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