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기로 할아버지는 평생 세 가지를 추구했다. 첫번째는 생존, 추적, 예지에 대한 옛날 기술을 가능한 한 많이 익히고 보존하고 전수하며, 되도록 자연스럽게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분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부족의 실용적이고 물리적인 기술을 터득하는 것만이 아니라 땅과 친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분은 북미 인디언의 기술이건, 숲에 살고 있는 은둔자의 기술이건, 원시적인 기술을 가진 이들은 누구든지 찾아나섰다. 그분은 모든 것에 흥미를 보였고 모든 걸 배우고 싶어했다. 할아버지는 알래스카에서 남미까지, 미국의 동부 연안에서 서부 연안까지,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지역을 망라하여 새로운 기술을 찾아 배우려고 했다. 그분은 어떠한 환경, 날씨, 지형에서도 이용 가능한 기술들을 배우고 싶어했다. 무엇보다도 장소와 여러 가지 상황에 제약받지 않는 기술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다. 또한 그분은 여인네들만이 알고 있는 기술도 배웠다.
할아버지는 이러한 인디언의 옛 기술들이 현대인들에게서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분에겐 옛날 기술들이 우리 사회의 숨막히는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서 궁극적인 자유에 이르는 관문이었다. 그 기술들은 자연을 수호함으로써 후손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전수해 주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생존 기술은 인간가 자연간의 싸움에 종지부를 긋는 도구였다. 자연에서는 더 이상의 충돌도 없고 완벽한 균형과 조화만 존재할 뿐이었다. 모든 싸움이 비로소 종결되는 곳, 즉 실재하는 에덴 동산인 황야에서 인간이 가정을 일굴 수 있는 것은 생존 기술들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기술들을 지키고 사용하는 것이 그분이 첫번째로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분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걸음을 내딛는 그날까지 끝나지 않을 탐색이었다.
두번째는 당신의 부족만이 아니라 땅과 친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영적인 지혜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분은 쓸모없거나 몇 사람에게만 쓸모 있는 것들을 찾지 않고 기적 같은 결과들을 낳는 진리를 추적했다. 그분은 세상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살아있는 영적인 지혜를 찾고 보존하며 전수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도 도움이 되는 자연계와 영혼계의 역동적인 대화를 모색했다. 그분은 육신의 차원에서만 자연에 사는 것은 황야의 전 의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은 육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보다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존재는 자연에서 더욱 이탈될 수밖에 없다. 영적인 기술 없이는 인간은 자연의 세계와 "하나"가 될 수 없고, 육신의 세계를 넘어서서 자연물들과의 의사 소통도 할 수 없다.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추구한 것은 세상의 모든 철학과 종료로부터 가능한 한 모든 것들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분은 목발에 의지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공동의 진리를 탐색했다. 그분은 온갖 어지러운 기만을 제거하고 "순수한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 옛 관습이며, 의식, 교리, 종교, 그리고 철학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이러한 영적인 진리와 지식에 대한 탐색이 그분 삶의 주된 동력이었다. 그분이 추구한 것들 중에서 최우선은 영적인 것이었다. 그분은 릭(할아버지의 손자이자 저자의 둘도 없는 친구/옮긴이)과 나를 가르칠 때도 영적인 가르침에 더 치중했다. 심지어 육체적인 훈련마저도 더욱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서, 영적인 가르침이 없는 수업은 거의 없었다.
--- pp. 16-18
그러나 혼자 있는 첫 두 주의 색다른 경험이 시들해지자 나는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체험들이 너무나 많았고 또 그런 것들을 목격했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런 외로움이 밤에 모닥불을 피울 때,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의 체험들을 나누던 밤 시간에만 찾아왔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외로움의 고통은 점점 더 잦아졌다. 특히 어둠이 짙게 깔리는 적막한 시간이면 더 격심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오로지 외로움을 떨쳐내기 위해 훈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연습하기 시작한 기술들은 더 많은 집중과 육체적인 난이도를 요구하면서 점점 더 복잡해졌다. 나는 단지 인간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소리를 질러 보기도 했다.
삼 주일이 지나자 나는 외로움의 포로가 된 듯한 느낌에 시달렸다. 잠시 숲을 빠져나가 집에 갔다올까도 생각했다. 심지어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 가까이 있는 아무 집이나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 자신과의 대화는 다소 장황해지고 복잡해지고 있다. 나는 생각을 소리내어 말하고 혼자서 대답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철저히 혼자고 버려졌다는 느낌뿐이었다.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외로움이 내 폐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다. 나는 지난 몇 주 동안 내가 체험했던 수많은 일들을 누군가와, 아무하고라도 얘기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만일 내가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혼자 있는 걸 좋아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나는 미치도록 혼자 있는 것이 싫었다.
할아버지는 혼자 있는 시간이 자신의 성장과 생존에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정신적인 차원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자주 얘기하셨다. 홀로 있기와 금욕 생활은 영적인 가르침의 일부이며, 그것을 거치지 않고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게다가 나는 숲과 영혼의 세계가 나를 쫓아내려 한다고 느꼈다. 그들은 나의 고립과 외로움을 일종의 제초기처럼 이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통과해야만 하는 일종의 시험 같았다. 나는 혼자임을 마음 편하고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혼자 고립되어 있는 것은 외로움을 점점 더 심화시키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이런 내 모습이 너무나 싫었다.
사주 째 되는 날 나는 마침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야영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며칠 집에 가서 사람들을 실컷 만나고 난 뒤 다시 숲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물건들을 다 챙기고 나서 나는 출발하려고 위를 올려다 보다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가 야영지 저쪽에 앉아서 나를 보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분을 보고 너무 좋아서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 기분은 이내 죄책감으로 변했다. 할아버지의 충고대로라면, 나는 적어도 4주는 혼자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나는 벌써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고 포기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할아버지는 반쯤 미소를 띤 채 나를 보고 계셨는데, 비난이나 실망의 빛은 없었다. 그분은 다른 말 없이 그냥 가까이 와서 앉으라고만 하셨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내가 그분과 나 자신을 실망시켰다고 느끼면서 주저하며 그분에게 다가갔다. 내가 묻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먼저 말씀하셨다. "이때쯤이면 네가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외로워서 결국엔 네가 숲을 나갈 거라는 걸 알았지." 내가 언제쯤 숲에서 나갈 것인지, 또 왜 나가려고 하는지도 정확히 알고 계셨기 때문에 나는 너무 놀랐다. 나는 외로움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한 것이며, 그 때문에 나란 사람은 영적인 길을 걸을 수 없다고 느낀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그분은 말씀하셨다. "혼자인 것과 외로운 것은 아주 많이 다르다. 너는 그 차이를 알아내야 한다. 누구나 한 번은 그런 질문에 부딪치는데, 너에게는 지금이 그때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
--- pp. 133-135
그는 갈증이 고통이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비로소 이해했다. 고통과 죽음은 사막의 현실이자 참모습을 감추고 있는 삶의 선물이었다. 다른 본능들과 마참가지로 인간을 살게 만드는 것은 심한 갈증이었다. 사막에서는 어떠한 실수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육체적·정신적으로 생존에 대한 감각을 더욱 곧추 세우게 하는 것이 바로 그 갈증이었따. 따라서 갈증을 이해하는 것이 생존의 최우선 과제였다. 이러한 사막에서 갈증은 인간에게 인간의 나역함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만든다. 나약함을 받아들여라, 그러나 싸우지는 말라. 할아버지는 마침내 사막에서 살아가는 가장 근본적이고 귀중한 법칙을 깨달았다. 그것은 갈증이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점이었다.
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갈증을 생존의 길잡이로 삼았다. 사막의 여러 다른 자식들처럼, 그 역시 물을 아주 잘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위와 갈증을 다시 정의 내렸다. 무더위와 갈증은 곧 전체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여졌고 또한 초월할 수 있는 존재들로 받아들여졌다. 사막에서 더위와 갈증은 늘 생존의 일부가 됨으로써 그 힘을 잃는다. 결국 할아버지는 더위와 갈증 없이는 사막이라는 살아있는 존재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바로 그 사막처럼 더위와 갈증 속에서 그는 하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더위와 갈증 역시 만물의 일부라는 아름다움을.
이 모든 깨달음이 할아버지의 의식 속에서 융합되기 시작하자, 그는 사막을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집에 있는 것처럼 아주 편안해졌다. 옛 정의들은 버려지고 새로운 현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할아버지는 사막의 리듬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사막에 섞여들었다. 그러자 그의 정신이나 육신에서 더 이상의 싸움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사막의 조건에 따라 그것에 순응하고 그것의 법칙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법을 배우면서 비로소 사막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사막에서 거의 죽을 뻔했지만 껍데기뿐이었던 이방인은 죽고 이 땅의 아이로서 거듭 태어났다.
--- pp. 259-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