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와 효종대의 실록이 전하는 민회빈 강씨의 캐릭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성품이 흉험하고, 행실이 좋지 않았다. 이재를 추구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고, 그 재물로 사람을 잘 유인하였다. 세자가 없을 때는 반드시 시강원의 장계를 가져다가 임의로 써 넣기도 하고 삭제하기도 하였으니 부인의 도리와 분수를 지키지 않았다. 세자가 강학을 폐하다시피 하고 무부와 노비들을 가까이 하며 화리만을 추구하고 서양 문물에 혹하는 등 많은 잘못을 범한 것은 대개 이 사람의 탓이다. 세자가 병이 있는데도 잠자리를 같이할 정도로 음란하였고, 임금의 처소 가까이에서 큰소리로 발악할 정도로 불순하고 거셌다.”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진실의 얼굴은 네모졌다가도 둥그레지는 법.
이재에 밝아 재물을 모으고 그것을 베풀어 사람을 끌어모음은 오늘날 여성 CEO의 자질이 아닌가? 중세적 부인의 도리를 과감히 벗어남은 일찌감치 현대적 여성 지도자의 면모를 발휘했다는 말이 아닌가? 소현세자의 많은 잘못이란 실로 조선의 국제화와 근대화를 이끌 지도자의 앞선 행보이니, 강빈은 그런 남편의 미더운 동반자였다는 말이 아닌가? 그녀의 음란함이란 지극한 사랑이며, 불순하고 거센 성격이란 정당한 분노의 솔직한 표출이 아닌가?
우리의 전통과 역사는 아들(그것도 잘난 아들)의 어머니만을 살리고 딸의 어머니를 죽인다. 모친살해의 현장에서 무력한 목격자가 되는 딸은 가부장제사회에서 아들의 어머니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한다. 자기를 죽여 버릇한 어머니들은 종종 딸들마저 습관적으로 죽이려든다. 이런 사회에서 어머니에게서 딸로, 그 딸에게서 딸로 이어지는 역사는 문자언어로 상징화되지도 상징화될 수도 없었다.
나는 문학 현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지금껏 어머니와 딸의 역사를 쓰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나의 작업은 늘 가부장제의 언어 안에서 헤매었고, 가부장제와 타협했고, 가부장제에 오염되었으며, 가부장제의 손을 빌렸다.
어찌하랴. 아지와 예옥의 어법을 빌리면, 나는 “살고 싶은 마음에 어찌할 줄 모르고” “천한 목숨이 아까워” 그리하였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머릿속에 등불처럼 켜져 있었던 이미지는 마돈나가 소장하고 있다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 「나의 탄생」이었다. 그림 속에서, 홑이불을 덮어쓴 여자는 액자 속의 성모가 눈물 흘리는 가운데 핏덩이 목숨과 사랑을 출산한다. 이 그림을 두고 여러 멋진 해석이 있지만, 나는 비린내 물씬 풍기는 이 그림에서 원초적인 허스토리herstory를 보았다. 우선적으로 목숨과 사랑의 역사인, 바로 그 지점에서 권력과 전쟁의 역사인 히스토리history와 구별되는 허스토리를.
나는 또한, 영화 「프리다」의 테마음악이었던 멕시코 노래 요로나La Llorona(울고 있는 여자)를 여러 가수들의 다른 목소리로 수백 번, 어쩌면 수천 번, 들었다.
내 사랑이 부족한가요? 내 삶을 통째로 바쳤건만 무엇을 더 원하나요? 내 사랑이 부족한 건가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더니, 지난 봄밤의 꿈속에, 360년 전 36세로 시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한 나의 주인공이 나타나 말했다.
“내 사랑이 부족한가요? 내 삶을 통째로 주었건만 무엇을 더 원하나요? 내 사랑이 부족한 건가요?”
꿈에 주인공이 보인 뒤라야 글이 풀리는 징크스가 있는 나로서는 꿈속에서도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그녀에게 말했다.
“내 심장에 달린 귀가 당신을 향해 열려 있어요. 어머니여. 어머니의 어머니여. 들려주세요. 당신의 삶을 통째로 내어주어야 했던, 그 사랑의 역사를.”
--- 저자의 말
1681년(신유년) 7월
올해 신유년은, 어머니가 서른여섯 춘추로 하세한 병술년(1646)으로부터 딱 서른여섯 해째가 된다. 이승에서 사신 만큼 명계에서 사셨으니 이제 다시 당신의 차녀에게로 임하셨나. 이는 갔다가도 늘 되돌아오고 물은 흩어졌다가도 늘 다시 이루어진다 했다. 당신 가신 날처럼 복사꽃 환한 봄날에 내 아기집으로 찾아든 이 아이는 아무래도 당신의 환생인 듯, 나는 요즈막 당신의 혼령에 도파니 사로잡혀 있다.--- p.21~22
1637년(정축년) 1월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태산이 새알 위에 드리워 있다 해도 정신만 차리면 살 구멍이 하나쯤은 있는 법. 이렇게 분기탱천해 있다고 하여 누가 나를 살려줄 것인가.
“아지야.”
목이 꽉 잠겨 들릴락 말락 작은 소리로 불렀는데도, 아지는 금세 발을 젖히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내 초록 당의와 큰머리 칠보, 은 첩지를 아지에게 내주었다.
“이것으로 정렬이를 치장시키고 너희들 몇이서 공손히 뒤따르라. 정렬이가 나의 뜻을 알리라.”
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지의 눈에 안도의 빛이 돌아왔다.
나는 컴컴한 가마 안에 독수리처럼 웅크리고 앉아, 내 입술의 상처를 혀로 핥으며, 이글거리는 숯불을 노려보았다.--- p.82~83
1681년(신유년) 섣달 그믐
“진정하게. 나는 자네와 평생을 함께 했네. 실로 살붙이보다 더한 사이가 아닌가. 자네는 어떤지 몰라도 나한테는 자네가 영감보다 더 스스럼없는 사람잀. 내게는 자네가 모르는 지인이라곤 없어. 자네에게는 내가 모르는 지인도 많겠지. 하지만 결국 내 어머니를 시봉하던 때 알았던 사람일 터. 만나봐야겠구먼.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유시를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잖나. 누가 아는가. 저이가 혹여 내 잃어버린 유시를 되살릴 단서를 줄는지.”
아지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굵다란 눈물방울이 그 무릎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되살려 무엇에 쓰시려오? 무엇에다 쓰시려고 그것을 되살리려 하시오? 아는 게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라는 옛사람들이 말하지 않았소이까?”
“내가 유시를 얻으면 내 생은 그만큼 더 길어지는 셈일세. 내가 유시를 끝내 못 찾으면 내 생은 육 년을 손해 보는 셈이지. 녹록히 물러나고 싶지 않아. 어이쿠, 눈이 오는군.”--- p.88~89
1642년(임오년) 윤11월
"창고에 곡물 가마니가 수북이 쌓여 있으니 그것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백성을 대하는 마음이 떳떳합니다. 일찍이 맹자께서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 하신 말씀을 오늘에야 절실히 깨닫습니다. 구중궁궐에서 일국의 세자입네 하고 밤낮으로 학문을 강론할 때는 오히려 이같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니 책상물림이란 바로 나와 같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겠지요.“
“……비록 남의 나라에서 백오십일갈이 네 군데로 시작한 농사이나, 소첩은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는 방도가 무엇인지 깨달은 바 있사옵니다. 본디 나라의 하늘은 백성이요 백성의 하늘은 밥이니, 밥을 하늘로 삼는 백성에게 밥을 배불리 먹이지 않고서 무슨 염치로 나라 섬기기를 바라겠사옵니까?……소첩은 처음부터 일하는 사람을 높이 대접하는 원칙을 고수했사옵니다. 그렇게 하니 생산이 절로 늘어났사옵니다. 생산이 늘어나면 백서읭 밥걱정이 없어지옵니다. 백성에게 밥걱정이 없어지면 항심을 따라오는 것이오니, 항심을 가진 백성들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 아니겠사옵니까?”
“내가 어질고 강인한 보필자를 두었으니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첫해 농사에 삼천삼백 석을 훌쩍 넘겨 생산한 것은 전수이 빈궁께서 마음과 힘을 다한 덕분이지요.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p.179
1644년(갑신년) 11월
군부의 금기를 제외하면, 우리는 모든 면에서 죽이 잘 맞았다. 나 못지않게 새로운 것, 신기한 것에 민감한 그이는 덕국인 탕약망을 깊이 사귀어 그가 시무하는 동당에 거의 날마다 행차했다.
……그이는 내가 탕약망의 이야기를 재미있어 하자 신이 나서, 탕약망을 만난 다음에는 반드시 나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기는 당신의 동생이나 신하들이나, 조선의 왕세자가 채신없이 양귀를 쫓아다닌다고 걱정이 늘어졌을 뿐, 당신 마음의 움직임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p.220
1682년(임술년) 정월 초열흘
“눈과 코는 동궁마마를 닮았고 입과 귀는 나를 닮았지? 그렇지? 안 예쁜 아이가 없었지만 이 아이는 특별히 더 예쁘구나. 제 아비가 하늘에 계시어 그런지 꼭 하늘나라 아이같이 성스러워.”
일곱 아기라더니.
유복자가 있었어. 유복자가.
나는 심장을 칼로 베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아지도 예옥도 끝끝내 말하지 못하였던 것, 내 만삭의 배를 앞두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였던 것, 그것은 어머니의 일곱째 아이였다.
--- p.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