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내리기 전에 읽어보세요
김기옥 (flytoafrica@yes24.com)
힘들어 죽겠다- 라는 말을 오늘 하루도 몇 번이나 중얼거렸는가?
배불러 죽겠다, 졸려 죽겠다, 우리는 말끝마다 '죽겠다'를 반복한다. (심지어 '얄미워 죽겠다' 라니!) 하지만 입에 '죽겠다'를 달고 산다고 정말 이 세상을 등지고 싶은 사람이 막상 얼마나 될까. 길거리에서 차가 조금만 가깝게 스쳐 지나가도, 무거운 물건이 옆에 떨어지기만 해도 '죽을 뻔 했다'며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는 것이 또 우리들이다. 그렇게 두려우면서도, 피하고 싶으면서도 '죽음'이라는 단어를 쉽게 내뱉는 우리들은, 어쩌면 그 죽음 뒤에는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 인간과 마주치는 일도,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일상도 더 이상은 없다. 눈을 감아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는 일상의 탈출구. 아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무책임한 짓 중 하나가 아닐까.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밤. 인간이 만들어놓은 무형의 경계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이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생각하고 거창한 의미를 부여한다. 마치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것처럼. 이 시간에 현재의 자신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 한 해와 함께 자신의 시간을 끝내고 싶은 네 사람이 자살 장소로 유명한 아파트 옥상에 모여든다.
15살짜리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유명 토크쇼 진행자에서 온갖 비난을 받아 마땅한 범죄자로 전락해 버린 마틴, 젊은 날의 단 한번 사랑으로 중증 장애아 아들을 얻고 지금까지 그와 함께 고생해 온 모린, 데이트한 상대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으며, 언니가 행방불명 중인 제스, 목숨과도 같던 밴드와 여자 친구를 한꺼번에 잃고 미래가 불투명한 제이제이. 그들은 공교롭게도 한 날 한 시에 죽을 마음을 먹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본의 아니게 방해를 주고 받은 그들은 자살 유예 기간을 발렌타인데이까지로 하고, 그 때까지 자신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꼬였던 인생이 한 번 죽을 마음을 품었다고 해서 잘 풀릴 리가 없다. 풀어보려던 문제들은 오히려 꼬여가고, 새로운 문제들로 인해 자살시도 전보다 상황은 오히려 좋지 않다. 같은 선택을 할 뻔한 동지라고 생각했던 네 사람의 관계도 악화되어가기만 한다.
작가는 죽음으로 행로를 돌렸던 네 사람이 삶으로 다시 방향키를 잡는 과정을 허무맹랑한 해피엔딩으로 그리지도, 쌍쌍이 엮어대는 주말연속극으로 그리지 않는다. 기적도 없다. 기적이라면, 그들 모두가 그 순간 몹시 죽기를 원했다는 것과, 그들이 우연히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는 것.
강렬하게 죽음을 원하는 의지야말로 가장 강력하게 삶을 원하는 것이다. 마틴은 옥상에 올라가 떨어지기 직전, 모린이 말을 걸기 위해 툭 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욕을 해댄다. 게다가 모인 사람들은 제이제이가 가져온 피자를 먹는다. 정말 죽음이 인생의 목표가 된 사람들이라면 먹을 이유도, 옥상에서 누가 밀었다고 화낼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살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의 지푸라기가 되어 죽음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사지(死地)에서 내려와 조금 더 살아보아도 여전히 기적은 없다. 그들은 그저 '살아갈' 뿐이다. 점점 나아질 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삶이 그 자리에 놓여있기에 그 가능성을 따라서 다시 걸어간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애써보며, 원하는 것을 시도해본다. 이런 노력들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기 때문에 삶은 또 잔인한 매력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마츠코는 "내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며 창 밖으로 몸을 던지기도 하고, 타락해버리기도 하지만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었다"며 또 눈부시게 부활한다. 그녀의 인생은 마지막까지도 전혀 아름답지 못했지만, 바닥을 치고 올라와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마츠코의 생의 의지는 눈부셨다.
끔찍한 일상을 종료해 줄 탈출구는 어찌 보면 무책임하게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이 아니라, 어렵게 선택한 삶이 아닐까. 옥상에 올라갔으면, 이제 그 아래로 고민들, 문제들, 우울함, 거슬리는 그 녀석(!) 등등 우리를 괴롭히던 모든 것을 던져버리자. 탁탁 손 털고, 크게 심호흡 한 번 하고, 내려올 때는 "계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