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학이나 음운론의 입문서는 두 분야를 구분하여 정의하고 그 연구 대상의 차이에 대해 기술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음성학은 인간의 말소리에 대한 물리적인 측면을 연구하는 분야이고, 음운론은 말소리가 패턴과 체계로 조직되는 측면을 연구하는 분야라는 것이다. 음성학에는 말소리가 생성되는 과정에 대한 조음 음성학, 화자로부터 청자에게로 전달되는 음파의 물리적 특성에 관한 음향 음성학, 청자가 음파를 지각하는 생리학적 과정에 대한 청각 음성학 등의 분야가 있다. 음운론은 이러한 물리적인 말소리가 개별 언어의 체계에서 어떻게 조직되고 표상(represent)되는지에 관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생성 문법(generative grammar)을 주창한 Chomsky는 언어 능력(competence)과 언어 수행(performance)을 구분하며, 언어 능력은 화자가 모국어의 언어 체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언어 수행은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언어 사용을 일컬었다(Chomsky, 1965). 생성 문법의 전통에서, 언어학자들의 연구 대상은 언어 능력에 국한하고, 언어 수행은 언어 외적인 영역으로 대부분 언어학 연구 대상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였다.
언어 수행의 예로 발화 대상, 화자의 사회적인 위치, 화자의 감정 상태 등에 따라 언어 형태가 달라지는 현상을 들 수 있다(Davenport & Hannahs, 2010). 이러한 소위 “비언어학적인” 요소들은 언어 형태에 영향을 미치지만, 언어 구조에 대한 지식과는 무관한 현상들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언어 연구의 전통을 말소리 관련 연구에 적용하면, 음운론은 언어 능력 혹은 언어 지식에 속하는 부문, 음성학은 언어 수행에 해당하는 부문으로 가정되었다. 음운 현상은 범주적(categorical)이고 개별 언어 특수적인 현상들, 음성 현상은 연속적(continuous)인 특징이 있고 말소리 관련 생리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언어 보편적인 현상들이라고 보았다. 이에 따라 음운 현상들만 개별 언어의 문법에 속하고, 음성 현상들은 보편 음성 부문에 속하여 문법 외적인 것으로 가정되었다(Chomsky & Halle, 1968).
그러나 이러한 연구 전통과 달리, 음성 내용도 개별 언어에 따라 체계적으로 차이를 보인다는 연구 결과가 상당히 축적되어 있다(3장). 예를 들어 Chomsky & Halle(1968)에서 동시 조음(coarticulation) 현상이 분절음과 분절음을 연결해 발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언어 생리학적인 음성 현상으로 거론된 바 있는데, Ohman(1966), Clumeck(1976), Manuel(1990), Beddor, Harnsberger, & Lindemann(2002) 등은 동시 조음의 정도가 언어마다 다르다는 것을 보였다. Keating(1985)은 이처럼 음성 내용도 언어마다 다를 수 있으므로, 언어마다 다른 음성 현상은 보편 음성 부문이 아닌 언어 특수적인 “음성 문법(phonetic grammar)” 부문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1.2절).
음성 내용이 언어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다른 방법 중 하나는 외국어 학습자의 음성 체계를 살펴보는 것이다. 학습자가 외국어의 상세한 음성 내용을 “점차적으로 학습”한다는 연구 결과는 역으로 모국어와 외국어의 음성 체계에 차이가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학습자가 모국어와 외국어 간 음성 내용의 차이를 점차적으로 지각하고 이를 조음에 반영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외국어 음성 자료 자체로서의 중요성뿐 아니라, 학습자의 자료가 음성학과 음운론 고유의 이론에 시사하는 결정적인 논점이 있다(Oh, 2008).
학습자가 외국어의 음성 내용을 점차적으로 학습한다는 실험 연구 결과가 상당히 축적되어 있고, 여전히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외국어 무성 폐쇄음의 학습에 관한 Caramaza, Yeni-Komshian, Zurif, & Carbone(1973) 및 Williams(1979), 스페인어 모국어 화자의 영어 유성 폐쇄음 학습에 관한 Nathan(1987), 영어 모국어 화자가 조음한 불어의 모음을 연구한 Flege & Hillenbrand(1984), 키추아어와 스페인어 이중 언어 화자들의 모음 체계를 연구한 Guion(2003), 네덜란드어 모국어 화자의 그리스어 억양 실현을 고찰한 Mennen(2004), 한국어 및 중국어 모국어 화자가 조음한 영어 낱말의 길이를 연구한 Baker, Baese-Berk, Bonnasse-Gahot, Kim, Van Engen, & Bradlow(2011) 등을 예로 들 수 있다(6장). 이러한 연구들은 외국어 말소리의 학습이 음성 단계에서 일어난다는 것과 학습자의 외국어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 음성 값이 모국어 화자 값으로 점차 접근함을 보여주었다.
“음성 단계에서 학습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앞서 언급되었듯이 음성 내용이 언어 특수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외국어 경험 정도와 모국어 값으로의 접근 정도가 양의 상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인간 언어의 말소리에 대해 내재론보다는 경험론을 지지하는 논증을 제공한다(3.1절). 예를 들어, 사례 기반 모델(exemplar-based model)에 따르면 한 화자의 어떠한 낱말에 대한 음성 표상은 그 낱말에 대해 일생에 걸쳐 쌓아온 음성 경험의 축적물이다(5.6.2절). 음성 범주와 체계의 형성도 음성 경험의 산물이다. 외국어 경험이 많은 학습자일수록 모국어 음성 값에 접근하는 현상을 모델링할 수 있다.
언어 경험에 따라서 음성 체계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어린이의 모국어 말소리 습득 과정을 통해 증명할 수 있지만 외국어 학습자의 음성 체계가 재구성되는 과정을 통해서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학습자의 음성 현상이 음성 학습에 관한 이론뿐 아니라 일반 음성 이론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외국어 음성 학습에 관한 연구 결과가 말소리의 각 단계에 대해서 상당히 축적되어 있다. 본서에서는 외국어 음성 체계와 관련된 주요 연구 결과들을 개관하고, 이들 연구 결과들이 제시하는 공통적 특징 및 차이점들을 진단해 보고자 한다. 또한 학습자 자료를 일반 음성 이론 및 외국어 음성 이론으로 모델링하고 이들 이론들을 발전적으로 재형성하는 데에 필요한 사항들을 점검할 것이다. 본서를 통해서 외국어 음성 체계에 대한 연구 분야의 현황을 미시적, 거시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 질문을 형성하는 시발점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였다.
___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