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포레의 독특한 음악세계는 피아노 음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가 전 생애 동안 만들어진 작품들 한가운데 이 악기가 있었다. 그는 피아노가 포함되지 않는 실내악을 단 하나만 썼고(그의 마지막 작품인 현악 4중주), 심지어 관현악 작품도 종종 피아노의 질감을 갖는 하프로 채색하곤 했다. 그 자신의 낭만적이면서도 추상적인 면, 자제력이 있으면서도 고도로 농축된 열정적인 음악 비젼, 상상력 풍부한 재능 등을 표현할 수 있는 매개체가 아마도 피아노였으리라.
포레는 니데르메이에르 음악학교에서 공부하려고 아홉 살에 남서부 프랑스의 시골 고향에서 수백 마일이나 떨어진 파리로 건너갔다. 이곳에서의 뛰어난 스승들 중 한 사람이 패기 넘치는 젊은 작곡가 카미유 생상이었다. 생상은 포레의 생애를 아우르는 조언자가 되었는데, 이 어린 작곡가는 생기발랄한 유머감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성적이고 우울해지는 경향이 있어서, 종종 그가 꾸물거리기라도 할 때면 생상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생상은 어린 천재 피아니스트로 유명했었는데, 그의 번뜩이는 찬란한 피아노 작품은 포레가 테크니컬한 피아노 음악을 쓰는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포레의 (제2번 즉흥곡에서처럼) 폭포처럼 쏟아지는 음표들은, 마치 마법처럼 추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람과 물을 연상시키는 청각적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비르투오소의 세계라기보다는 시인의 세계와 같은 느낌을 준다. 아마도 그것들은 작곡가가 사랑하고 프랑스의 수도에서 지내며 그리워했던 자연에서 힌트를 얻은 것일 게다.
생상만이 포레에게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슈만은 쇼팽, 리스트와 함께 포레가 특별히 좋아했던 작곡가였다. 생상은 1877년 포레를 리스트에게 인사를 시켰는데, 연상인 리스트가 포레의 op.19 발라드를 초견으로 연주하기 시작했지만 곧 연주를 멈추고는 깜짝 놀란 젊은 포레에게 "이제는 손가락이 낡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확한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이 이야기는 가끔 선명하고 섬세한 사운드의 이 작품이 얼마나 기술적으로 어려운지를 설명하는데 인용되곤 한다. 이 작품에다 관현악 반주를 덧붙여 보라고 권한 것은 리스트였다. 따라서 이 발라드는 하나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다른 하나는 피아노 솔로로 연주하는 두 가지 버전이 전해진다. 흥미롭게도 이 발라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인물은 (포레로선 좀 이상스럽기도 하지만) 바그너였다. 포레는 이 작품은 '지크프리트'의 '숲의 속삭임'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래도 역시 포레의 피아노 작품을 표제음악이라고 볼 수는 없다. 포레가 선호했던 장르는 쇼팽을 따른 녹턴, 뱃노래, 전주곡, 발라드 등이었지만 이 장르의 성격을 그저 살짝 담고있다는 정도였고, 그나마도 어떤 경우엔 의미가 없었다. 이를테면 8번 녹턴은 출판업자가 편의를 위해 이름을 붙인 것이고, 12번은 녹턴은 처음에는 뱃노래였던 것을 이렇게 바꾼 것이다.
포레의 피아노곡을 성공적으로 연주하려면 피아니스트는 반드시 대단히 유연한 테크닉을 가져야만 한다. 고도로 연마된 감각, 어쩌면 무엇보다도 미묘하게 얽혀있는 예민함, 감상적 분위기로 미끄러져 들어가거나 늘어지지 않는 엄격한 구조 속에서 예상치 못한 조바꿈을 하는 그 예민함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그 자신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포레는 일설에는 양손잡이였다고 하는데, 그의 피아노곡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듯도 하다. 새로운 질감을 창안하는 끝없는 그의 능력은 종종 위 아래 양쪽 모두 얇고 가볍게 다듬어진 패턴으로 인해 양손과 반주부로 나뉘어져 있는 건반의 중앙부에 멜로디를 위치시키곤 했다. 그렇지만 이 패턴 속의 각각의 음표는 화성적 조화를 위해 매우 조심스럽게 선택된 것들이다. 뱃노래, 특히 1번의 경우 마치 호수면 바로 아래의 보석처럼, 멜로디가 음파를 통해 두드러지게 빛나는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포레 피아노 곡의 유연성과 독창성은 결과적으로 소품에서 조차 폭 넓은 표현력을 보여준다. 예컨대 3번 녹턴은 경쾌한 작은 살롱 음악처럼 시작된다. 하지만 포레는 곧 제 1주제를 이어지는 강세가 없는 패턴의 흐름 속으로 풀어 놓는다. 마치 그의 사고(思考)가 사실성을 포기하고 추상적 영역 저편에서 피어 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포레는 "예술 특히 음악은 가능한 실재(實在) 그 너머로 멀리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이라고 썼다. 그의 피아노 작품은 이러한 그의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 6번 녹턴은 3번에 비해 몇 단계 더 나아간다. 아치형의 형식은 첫 번째 섹션의 평온함과 들뜬 두 번째 섹션과 마법 같은 아름다움의 주요 에피소드를 대비시킨다. 건반 고음부에서의 단편적인 멜로디가 황홀한 피아노의 살랑거림 한가운데에 자리한다. 사실성은 제 2 주제의 재현에서 겨우 끼어 드는 정도이고 제 1 주제의 클라이맥스에서도 그렇다.
포레는 '실재(實在) 그 너머'로 이끌어야 할 필요성을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소모적인 생활방식 때문에 견실하게 작곡할 시간을 찾기 어려웠고, 편두통과 우울에 자주 시달렸다. 오랜 세월동안 그는 마들렝 대성당의 성가대 지휘자인 동시에 가르치기에 바쁜 나날을 보냈으며, 부양해야 할 어린 두 아들과 머지않아 불행하게 된 결혼이라는 가정 생활 역시 큰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1896년 그는 파리 국립 음악원에서 작곡과 교수직을 제의 받았는데, 여기서 라벨, 에네스쿠, 쾨클랭, 나디아 불랑제 등의 제자를 키워냈고, 이어 1905년에는 이 음악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어 필연적으로 자신의 에너지의 대부분을 소모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름 몇 달 동안 가능하다면 어느 때고 곡을 쓰기 위해 파리를 빠져나가 '여름 휴가'작곡가가 된 것이다. 선호하던 그의 목적지는 항상 물이 가까운 곳이었다. 그는 특히나 루가노(스위스 남부 소도시)와 생의 마지막에는 앤시(프랑스 론알프주의 도시)를 사랑했다. 또 1891년 베니스를 방문해서는 무척이나 감명을 받았었다. 그는 호수면에 어른거리는 빛을 보는걸 좋아했다. 아마도 포레의 반음계가 부침(浮沈)하는 빛과 그림자의 교차 속에서 어떤 음악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6번 녹턴의 꿈꾸는 듯한 느린 곡이나 2번 전주곡(가장 포레답지 않은 곡 중 하나로 5/4박자다)의 경쾌한 변화처럼 빠른 곡이거나 말이다.
비극적이게도 포레는 50대 중반무렵 청력을 잃기 시작했다.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거의 완전히 귀가 멀게 되었다. 그의 마지막 스타일은 (난청 때문인지 혹은 난청에도 불구하고 인지는 모르겠으나) 여분의 음표 없이 좀더 응축하려고 개발되었다. 반면 화성은 실험성과 모호함이 더 강해졌다. 그의 마지막 피아노곡 13번 녹턴은 이런 스타일의 최정점이다. 중기 녹턴의 다면성과는 대조적으로 하나의 분위기로 작용하는, 거의 바로크라 할 수 있는 불타는 듯 격렬한 주제 제시로 단일화되어 있다. 이 곡은 1921년 12월에 완성되었는데 생상의 사망 직후였다. 이 음악 속의 어둠과 명백한 절망은 아마도 이 시기 포레의 감정을 비추는 것일 게다. 그리고 자신의 정신적 지도자의 죽음을 암묵적으로 그 자신 죽음의 전조로 여겼던 것 같다. 포레는 이따금씩만 자신의 정서적 상태를 자신의 음악에 명쾌하게 투영하곤 했다. 감상자는 단지 이 압도적인 명작을 만들어낸 내면의 흥분을 짐작할 뿐이다.
포레의 피아노 음악은 독특한 미학 공간에 위치한다. 슈만과 드뷔시 사이, 쇼팽과 라벨 사이, 미묘하게 혁신적이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공간에. 이전에는 과소평가되고 무시되었지만 지금은 정말 귀중한 보물로 평가 받게 되었다.
--- 음반 속지 중에서 제시카 더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