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정의와 개념
인류의 유골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이 장례 행위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유골이 땅에 묻힌 시점부터 겪게 되는 과정이자 발견 당시 유골의 상태를 설명해줄 수 있는 과정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유골이 어떤 지형학적·퇴적학적·문화적 배경에서 변화해왔는지도 연구해야 한다.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두고 ‘화석생성론적 연구’라고 부르며(화석생성론taphonomy은 고생태학의 한 분야로 생물의 유해가 지층 속에 매몰된 후 화석으로 생성·보존되는 과정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옮긴이), 인류의 유골이 연구 대상인 경우는 ‘현장인류학’이라고 말한다.
인류학자 앙리 뒤데Henri Duday에 따르면 현장인류학자가 묘를 화석생성론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시신이 묘에 묻힌 이후 그 유골에 영향을 미친 과정들을 그것이 뼈나 뼈의 배열 상태를 보존하는 성질의 것이든 보존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든 모두 연구하는 것”을 뜻한다.
이때 인류학자는 과학적 연구 장비 외에도 관찰자와 발굴자, 화가(요즘에는 디지털 사진기를 주로 쓰지만)로서의 자질을 활용하며, 인체해부학과 시신의 부패 과정에 관한 지식을 동원한다. 그리고 뼈들 사이의 정상적인 해부학적 관계가 어떤 식으로 흐트러졌는지 특히 주의 깊게 살핀다. ‘관절 탈구’나 ‘골학적骨學的 결합’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다. 인류의 골격은 성인의 경우 약 242개의 뼈와 치아로 구분된다. 관절 부위에는 보통 2개 이상의 뼈가 연결되어 있어서(발에는 6개까지 연결된 부위도 있다) 관절의 탈구 상태를 분석하는 일은 무척 복잡하다. 시신이 화석생성론적 변화를 겪으면 뼈가 움직여서 예상했던 모습대로 놓여 있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에 분석의 어려움은 더 커진다. 더구나 뼈들이 탈구되는 ‘규칙’은 유골이 성인인지 소아인지 유아인지에 따라 차이가 난다. 미성숙한 개체의 뼈는 성장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뼈들이 관절에 구속되는 정도가 성인과 다르다. 게다가 일을 또 복잡하게 만드는 문제는 그 ‘규칙’이 고고학적·퇴적학적 환경에 따라서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p.21~22
2장 전기 구석기시대
앞에서 말했듯 인류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언제나 묘의 존재를 말해주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일부 뼈들이 서로 결합된 상태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화석은 1998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테르크폰테인Sterkfontein 동굴에서 나온 오스트랄로피테신(Australopithecine,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속Australopithecus과 파란트로푸스 속Paranthropus을 가리키는 용어?옮긴이) 화석으로, 약 360만 년 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그 유골의 일부 뼈들이 해부학적 결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동시대 인류의 장례 행위에 따른 결과라고 보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땅에 자연적으로 빠르게 묻히기만 해도 그러한 특징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학자 베르나르 반데르메르슈Bernard Vandermeersch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구석기시대의 경우 유골이 없는 묘는 존재하지 않으며, 역으로 묘 없이 유골이 보존되는 것도 예외적인 일이다. … 실제로 유골이 뼈들 사이의 결합이 유지된 상태로 남아 있으려면 시신을 포식동물과 청소동물(생물의 사체 따위를 먹이로 하는 동물?옮긴이)의 활동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동물들이 시신의 뼈를 순식간에 해체하고 흩뜨려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p.37~38
3장 중기 구석기시대
전기 구석기시대와 중기 구석기시대를 연대적·문화적으로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대략 25만 년 전으로 그 경계를 가를 수 있다. ‘르발루아기법Levallois technique’이라 불리는 새로운 석기 제작 기술이 나타난 시점을 기준으로 한 구분이다. 유럽과 서아시아에서 중기 구석기시대는 무스테리안Mousterian 문화와 동일시되는 반면, 아프리카에서는 ‘중기 석기시대Middle Stone Age’라고 말한다. 중기 구석기시대의 인류는 그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수렵·채집인이었으며, 식량 자원을 따라 연중 여러 장소로 이동하며 살았다. 그리고 주거지는 대체로 ‘안락함’을 기준으로 선택했다. 남쪽을 보고 있어 방향이 좋고 수원水源과도 가까운 바위그늘rock shelter 같은 곳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프랑스 도르도뉴Dordogne의 작은 마을 페이작르무스티에Peyzac-le-Moustier에 위치한 주거지 유적은 이례적인 성질을 띤다. 비몽Vimont 강과 베제르Vezere 강이 만나는 유역 근처의 절벽에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스테리안인들이 그곳을 실수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절벽을 이루는 여러 높이의 수평면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일종의 ‘선사시대 아파트’로 활용한 것이다. 무스테리안인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돌을 이용해 다양하고 전문적인 도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재료를 성질에 따라 골라 썼고,
원하는 재료를 구하기 위해 수십 킬로미터의 길을 가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무스테리안 문화에서 석기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매우 크다. 당시 사용된 도구 중에 동물의 뼈나 뿔로 된 것은 돌을 잔손질할 때 쓴 간단한 다듬개 말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데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p.47~48
4장 후기 구석기시대
프랑스 지역의 후기 구석기시대는 연대적·문화적 기준에 따라 다시 여러 시기로 세분된다. 제일 오래된 문화는 마지막 네안데르탈인의 소산에 해당하는 샤텔페로니안Chatelperronian 문화다(4만~3만 4000년 전). 그다음은 오리냐시안Aurignacian 문화로(3만 6500~2만 8000년 전) 이 시기에 현생인류가 인류를 대표하는 유일한 종으로 자리매김한다. 그 뒤를 이어 그라베티안Gravettian 문화(2만 9000~2만 1000년 전)와 솔류트리안Solutrean·바드굴리안Badegoulian 문화(2만 2000~1만 7000년 전)가 차례차례 들어서고, 마지막으로 막달레니안Magdalenian 문화(1만 7000~1만 2000년 전)가 출현한다. 이러한 구분은 물론 서유럽 전체에 적용되지는 않으며, 세계 다른 지역들에 대해서는 타당성이 더 떨어진다.
후기 구석기시대 인류는 중기 구석기시대 인류 집단과 비슷한 환경에서 살았지만 생활방식은 달랐다. 우선 이전까지는 산발적으로 확인되던 기술적 혁신, 예를 들어 동물의 뼈와 뿔, 상아로 도구나 무기를 만드는 일이 보편 현상으로 나타난다. 후기 구석기시대 인류는 돌을 깎고 사용하는 데에도 새로운 전통을 사용했으며, 특히 얇고 길쭉한 형태의 규석 돌날을 체계적으로 사용해 다양한 도구를 제작했다. 동물의 뿔과 상아를 이용한 작업이 증명하듯 미적 부분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조개껍데기나 상아, 동물의 뼈와 뿔, 이빨 등으로 만든 장신구처럼 비실용적인 물건도 많이 만들었다. 암석에 줄무늬나 매우 사실적인 동물 그림을 새겨 넣는 활동도 보여주었다. 서유럽의 서쪽 지역에서 동굴미술이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3만 2000년 전의 일이다. 또한 후기 구석기시대에는 물건들이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이동하는 현상도 나타났는데, 이는 중기 구석기시대에 비해 지역 간의 이동 및 교류가 크게 늘어났음을 뜻한다. 끝으로 후기 구석기시대의 주거지는 이전보다 더 체계적이고 특수화된 성질을 띠었다.--- p.73~74
5장 중석기시대
화장이 행해졌다는 것이 중석기시대를 이전 시대와 구분하는 유일한 차이점은 아니다. 가령 중석기시대에는 이전 시대와 달리 묘지가 주거지를 벗어난 곳에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이 같은 특징은 중석기시대 초에 특히 두드러졌다. 하지만 역시 제일 중요한 차이점은 공동묘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석기시대에는 일차장이 한곳에 모인 장소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테비엑 유적에는 유골 23구가 묻힌 무덤 10기가 모여 있고 외딕 유적에는 유골 14구가 묻힌 무덤 9기가 모여 있다. 그리고 샤랑트마리팀의 라베르뉴La Vergne 유적(기원전 제9천년기)의 공동묘지에서는 장례 행위와 관련된 다양한 구조물과 물건들이 발견되었다. 성인 유골 여러 구와 소아 유골 1구가 동시에 매장된 묘(일차장), 성인 유골 1구의 화장 잔해(이차장), 인류의 치아로 만든 펜던트를 포함한 많은 양의 물건,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옆으로 누운 자세의 성인 유골 1구와 소아 유골 1구가 각종 부장품(황토, 장신구, 조개껍데기, 오록스의 뿔[여기서 말하는 ‘뿔’은 뿔의 각질 부분을 떠받치고 있는 골질 부분을 말한다] 두 개)과 함께 묻혀 있던 묘(라베르뉴10) 등이 그것이다.
--- p.98~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