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바이칼호수에 알흔섬이 있다. 이 섬은 코리족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 황소가 하늘에서 내려 온 백조를 부인으로 맞아 11형제를 낳았는데 이들로부터 코리족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 코리족의 한 분파가 바이칼에서 동남쪽으로 이동해 코리→고리→고려(고구려를 본래 고려라고 부른다)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나 《양서梁書》에서는 주몽을 “북이北夷(동이東夷가 아님을 주목하자) 고리국槁離國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청淸대 한자 대사전이랄 수 있는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는 고려의 ‘려麗’를 ‘리’로 발음한다고 되어 있다. 또 이 지역에서는 명사수를 투멘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주몽(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과 발음이 비슷하다. 현재 바이칼호수 동쪽에는 몽골족의 한 분파인 부르야트족이 살고 있다. 혹자는 이 부르야트가 부여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부르야트인들은 사먼을 지칭하는 아르바이Arbai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r 발음이 약화돼 아바이Abai로 부르기도 한다. 또 몽골인들은 한국을 솔롱구스라고 한다. 바이칼 인근에는 솔론Soklon족이 있는데 이들과 한민족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또 인근에는 오랑키족도 있다. ---「한민족의 시원을 간직한 바이칼호수」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중국 운남성云南城 서남부, 미얀마 서북부와 태국 북부, 라오스 서북부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라후족〔拉祜族〕이다. 라후족은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고, 닭을 옆에 두고 결혼식을 올리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등 고구려와 유사한 풍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들이 입는 옷이나 몸에 하는 장신구 등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들도 명절 때면 우리처럼 색동옷을 입는다. 식생활에서도 음식물을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먹고, 채소를 소금으로 절인 후 물로 씻어내고, 밥을 으깨 넣어 발효시켜 먹는다. 이현복 서울대 명예교수는 “라후어는 문장을 이루는 낱말의 배열 순서가 주어+보어+술어로 한국어와 일치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라후어 ‘너레 까울리로 까이베요’는 ‘너는 한국으로 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너레’의 ‘너’는 우리말 ‘너’와 형태가 아주 비슷하다. 또한 ‘레’는 북한 사투리 ‘내레’의 레처럼 주격 조사로 볼 수 있다. ‘~로’ 역시 ‘서울로’, ‘광주로’와 같은 움직임의 방향을 나타내는 우리의 격조사와 형태나 기능이 같다. ‘까이’도 우리말 ‘가다’와 뜻과 발음이 유사하다. ‘까울리’는 중국이나 태국 등지에서 ‘고구려’나 ‘고려’를 뜻하는 말로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라후족의 기원은 고대 중국의 감숙甘肅와 청해靑海 지역에 살았던 민족들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청해성은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병사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따라서 라후족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에 잡혀갔다가 오지에 버려졌던 고구려의 후손들일 가능성이 높다. ---「라후족, 백제향, 그리고 고선지와 이정기」중에서
당시 거란과 맞서고 있던 송나라는 공교역에서 고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때문에 송이 고려로 보내는 이른바 사여품賜與品이 고려가 보내는 조공품보다 훨씬 더 많았다. 무역 역조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고려가 송에 수출한 물건은 금·은 기구, 화문능라花文綾羅, 세저細苧(세모시), 생포生布, 인삼, 표피豹皮(표범 가죽), 해표피海豹皮(바다표범 가죽), 백지白紙, 향유, 화문석, 나전螺鈿, 장도, 지紙, 필筆, 묵墨, 부채 등으로 다양했다. 송에서 수입한 물품은 의대衣帶, 말안장, 채단綵緞, 칠갑漆匣, 옥玉, 물소 뿔, 금·은 기구, 금박金箔, 차, 향료, 약재, 자기, 서적, 악기, 화폐 등이었는데 중국산이 아닌 것도 많았다. 서남아시아산 물건이 송나라를 통해 고려로 들어온 것이다. 이 교역에 대해 소동파蘇東坡는 “우리가 받은 조공품은 노리개 같은 불필요한 물품인데 백성들이 고생하며 번 돈으로 그것들을 사고 있다. 고려 사절단이 가져온 물품들이 시장을 어지럽힌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또 “고려의 교활한 상인들이 아무 때나 조공을 핑계로 들어와 중국을 소란케 한다”며 강한 거부감을 표출했다. 학자이자 정치가인 사마광司馬光 같은 이들도 실익 없는 고려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중국의 지식인들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린 것을 보면 무역 역조 현상이 생각보다 심각했던 것 같다. ---「대식국 상인이 드나들었던 동아시아 무역의 거점 벽란도」중에서
13~14세기에 몽골제국은 ‘팍스 몽골리카(몽골 지배하의 세계 평화)’라는 이름에 걸맞게 동유럽에서 고려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인류 역사상 전에 없는 규모의 인적, 물적 교류를 촉진시켰다. 또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종교 등을 강요하지 않는 몽골의 지배방식 덕분에 몽골제국 안에서는 여러 민족이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 공녀제는 조혼 풍조를 확산시키는 등 고려의 전통사회 질서에 변화를 일으키는 한편 몽골 귀족 사회에는 고려양高麗樣, 즉 고려풍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원나라 말기에 궁중에서 일하는 여인 가운데 절반가량이 고려 여인이었고 몽골 귀족들 사이에서 고려 여인을 부인으로 맞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들을 통해 고려식 복식과 음식, 기물 등이 유행하게 되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세계 제국 몽골의 심장부에 한류 바람이 분 것이다. 일부 고려 여인들은 중국 대륙을 넘어 인도, 중앙아시아로 시집을 가기도 했다.충렬왕 24년(1298) 6월 마팔아국馬八兒國의 왕자 패합리唄哈里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은사모銀絲帽와 침향, 베 등을 바쳤다. 마팔아국은 인도 코로만델 해안에 있는 작은 나라로 면포의 산지로 유명하다. 이 마팔아국에서 고려에 선물을 보낸 것은 왕자비가 고려 사람인 채인규蔡仁揆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번영을 이룬 고려 말의 세계화」중에서
세종 초기의 기록을 보자. 특히 기록에 나오는 도로都老라는 인물이 흥미롭다. 그는 태종 때 처음 조선에 들어온 듯하다. “회회回回 사문沙門 도로가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임금이 명하여 집을 주어 살게 하였다(《태종실록》 권13, 태종 7년 1월 17일자)”. 도로는 수정을 채취해 여러 물건을 만들어 바쳐 왕의 신임을 받았고 왕은 그에게 전국의 수정을 캘 수 있도록 허용했다. 무슬림 도로는 《조선왕조실록》에 항상 회회 사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문은 일반적으로 성직자 계층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즉 도로는 당시 조선에 있었던 무슬림 공동체에서 종교 지도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전통 의식 보존에 대해 묵시적인 동의를 받아 토착 문화와 별다른 갈등 없이 15세기 초 조선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궁중 의례에까지 정기적으로 초청받아 참석했다. “다음으로 승려 및 회회인들이 뜰에 들어와 송축頌祝하고 끝나면, 판통례判通禮가 꿇어 엎드려 예를 마쳤다고 아뢴다. 통찬通贊이 예를 마침을 창하면, 전하가 좌에서 내려오고 풍악이 울린다(《세종실록》 권1, 세종 즉위년 9월 27일자).” 당시 궁중 연회에 참석한 무슬림들은 그들 고유의 의식으로 축하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코란을 낭송하며 왕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는 궁중에서 코란이 읊어지던 시대였다. -
--「회회 사문, 유구국, 베트남… 귀화한 외래 성씨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