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함경북도 경성 어랑 출생. 1929년 배재중학교 3학년 때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출감 후 학업의 길이 끊긴 이래 서울 마포 도화동 토막 빈민촌에서 여러 해 동안 빈민 아동 교육에 종사했다. 빈민 아동 교육을 하던 중 김교신 선생을 찾아 신앙지도를 받다가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인 쓰카모토 도라지선생의 주일 성서연구회에서 10년간 성서를 배웠다.1945년 귀국한 후, 월간『성서연구』를 창간,1999년 12월 제500호까지 발간했다. 또한 일제에 의해 거의 멸실되다시피 한 『 성서조선』158권 전권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편집하는 등 10여년에 걸친 노력으로 1975년 김교신 전집을 완간했다.
김교신은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1916년에는 함흥공립보통학교를, 1919년에는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를 거쳐 1922년 당시 중등학교 교사 양성기관으로 최고 명문이던 동경고등사범학교에 나중에 벗이자 신앙 동지가 되는 함석헌과 함께 입학한다. 그런 그가 기독교에 접하게 된 것은 1920년 거리에서 설교를 듣고서였다.
하지만 다니게 된 교회에서 목사가 반대파에 축출되는 등의 병폐를 목격한 뒤 실망한 상태에서 무교회(無敎會) 신앙을 주창하는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강의 청강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무려 7년에 걸쳐 지속된다. 1927년 귀국한 김교신은 함흥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신앙 동지들인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류석동, 양인성과 함께 발간하기 시작한 동인지 『성서조선』의 간행을 돕기 위해 1928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전근, 이후 12년간 『성서조선』의 간행과 양정학교 교사로서의 생활을 병행하기 시작한다.
김교신은 1930년부터 『성서조선』의 간행 책임을 혼자서 전적으로 맡게 된다. 낮에는 교사, 그 외의 시간에는 『성서조선』 편집자이자 필자, 제작.발송.판매.경리 담당자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김교신은 또 그런 짬짬이 기독교 선교 및 무교회 신앙의 전파에도 적극 나선다.
김교신이 남강 이승훈, 기독교계 원로인 김정식, 다석 류영모, 춘원 이광수를 비롯 당시 농촌 운동을 벌이던 김주항과 군국주의를 비판하다 동경대 교수직에서 쫓겨난 야나이하라 다다오(전후 동경대 총장 역임) 등과 교분을 두텁게 하게 되는 것도 이런 과정에서였다. 하지만 1940년 김교신은 양정을 사임하게 되고, 1941년에는 서울 경기중학교에 6개월간 머물렀다가 바로 개성의 송도중학교로 자리를 옮긴다. 이 모두가 김교신의 『성서조선』이 가진 민족적 색채로 말미암아 조선총독부에 요주의 인물 내지는 불온 인물로 낙인찍힌 탓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이 벌어진 것은 김교신이 개성의 송도중학교에 근무하던 1942년 3월 30일의 일이었다. 근대 한국을 만든 명 논설 33편(『신동아』 1966년 1월호 부록 『근대 한국 명논설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성서조선』의 권두언 「조와(弔蛙)」가 문제가 되면서 전국적으로 『성서조선』 관련자 및 독자들이 검속되는 이 사건에서 『성서조선』 관련 자료는 일제에 의해 철저히 압수.소각된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벌어지기 7개월 전의 일이었다. 구속되고 만 1년만인 1943년 3월 29일 불기소로 출옥한 김교신은 이후 전국 각지는 물론 만주까지 순회하며 신앙 동지들을 격려하고 기독교 전파에 몰두하다 1944년 7월 함경남도 흥남의 일본질소비료회사에 입사한다. 강제 징용당한 5,000여 한국인 노무자의 복리후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후 한국인 노무자들의 교육, 주택, 처우 개선에 골몰하던 김교신은 해방을 4개월여 앞둔 1945년 4월 25일 발진티푸스로 생을 달리 한다. 장례는 평소 김교신을 존경하던 일본인 간부의 주장에 의해 최초로 공장장(工場葬)으로 거행됐다. 향년 44세 때의 일이었다.
참고 : 김교신 선생과 관련해서는 우석대 사학과 박상익 교수님의 사이트(http://www.nonchurch.net)를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