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전공분야인 물리학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또한 비록 서로 종교는 달라도 각자 자기 신앙 안에서 이 책에 담긴 성찰 지침을 따라 자기성찰의 삶을 날마다 끊임없이 실천해 간다면, 누구나 세속의 잣대와 초연하게 남은 생애 동안 통보불이의 멋진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종교와 종파를 초월해서 성찰을 위한 다른 수행의 세계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저처럼 간화선 수행을 하고자 하는 분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자신과 코드가 맞는 스승 문하에서 참구하고 있는 화두에 대해 철저히 입실점검을 받으며 수행을 이어가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 p.8
대체로 경전經典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즉 모든 만물은 다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왜 조주趙州 선사께서는 “무無!”라고 했을까? 하는 것이 이 화두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有(있다)?無(없다)’라고 할 때의 ‘없다’를 뜻하는 ‘무無’라는데 걸리면, 이 화두는 평생 해결 못하는 난제難題로 남게 됩니다. 따라서 어떻게 유有와 무無를 초월할 것인지는 각자가 진지하게 체득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조주 스님은 불성佛性 자체에 관한 자신의 선적禪的 체험을 바탕으로 본인도 우주도 ‘무無’자字와 일체가 되어, 물음을 던진 승려 앞에 체득한 바를 있는 그대로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자! 여러분! 불교에서는 모든 만물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왜 조주 스님은 ‘무無!’라고 했는지에 관해 여러 조사어록祖師語錄들에 담겨있는 언구言句들은 모두 다 집어던지고, 직접 다리를 틀고 앉아 ‘조주무자趙州無字’와 철저히 한 몸이 되어, 조주 스님의 배짱을 스스로 꿰뚫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편 석가세존께서는 모든 만물은 다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설하셨기 때문에 아무리 하찮은 개라고 할지라도 불성이 있는 것이지만, 조주 스님은 어떤 승의 질문에는 ‘무無!’라고 대답을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날은 다른 승이 꼭 같이 물었는데 이때는 ‘유有!’라고 대답을 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조주 스님의 ‘유’와 ‘무’는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뜻의 ‘유’나 ‘무’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며, 사실 팔만사천 법문을 다 뒤져보아도 이에 대한 견해는 결코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스스로 체득해야만 조주 스님의 배짱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 p.111
박영재 법사는 나눔이 빠진 깨달음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아닌, 즉 먼저 남을 이롭게 하고 그 다음에 부수적으로 내가 이로우면 좋다는 뜻의 ‘이타자리利他自利’를 선양하는 것이 선도회의 가풍이다. 자비와 지혜를 양 날개로 히는 나눔이야말로 선정의 궁극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선도회 회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나눔과 재능기부를 실천하고 있다. 얼마 전 교도관으로 일하는 광주모임의 한 회원이 교정센터에서 재소자들을 위한 참선모임을 열었다. 그 가운데는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아는 재소자도 있다고 한다. 선도회 회원들은 양로원이나 요양원 봉사를 비롯해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을 위한 참선지도까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임제 선사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을 직접 실천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문출유四門出遊를 통해 출가를 하셨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문출유多門出遊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깨어있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다 화두이며 수행이지요.”
매순간 깨어있기 위해 박영재 법사는 원오극근 선사의 선어록을 빌려 ‘좌일주칠坐一走七’을 이야기한다.
“하루 중에 8시간 잠은 충분히 자고 깨어있는 16시간 가운데 1/8은 좌선을 하고, 7/8은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한다는 뜻입니다. 재가에 있으면서 자기 전문직에는 소홀히 한 채 산중으로 쫓아다니는 것이 수행은 아닙니다. 잠자는 시간은 빼고, 아침에 일어나서 1시간, 잠들기 전에 1시간 좌선과 자기 성찰을 하면 나머지 14시간을 본업에 온전히 매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 본업은 타인을 이롭게 하는 일이 되겠지요. 며칠만 한 번 해보세요. 피로도 사라지고, 날마다 생수불이生修不二가 저절로 될 겁니다. 숭산 스님이 말씀하셨죠. 오직, 할뿐이다.”
삶과 수행이 둘이 아닌 이치. 결국 일상 속의 선정이란, ‘오직, 할뿐’인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무아無我’와 ‘회향回向’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문 없는 문을 통과하였는가, 혹은 두 개의 문을 동시에 투과하였는가? 오직 모를 뿐! --- p.262
부산으로 발령 나고 2014년 9월 13일 법경 노사님께 입실했다. 그날 입실을 마치고 하루 종일 충격 속에 있었다. 화두수행은 늘 나의 기대를 배신하였다. 때로는 그 충격이 곧 환희심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이번 입실을 통해서 그동안 그렇게 먼 길을 돌아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묻고 또 물었다. 한마디로 억울했다. 그렇게 단순한 것이라면 그동안 찾고자 했던 것들은 다 무엇인가?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옛 어른들이 말씀하셨다는데 이걸 두고 한 말씀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로운 화두를 들다보면 그 단순성을 잃어버리고 또 한참을 먼 허공 속에서 헤매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곤 할 것이다. 결국 그 자리는 떠난 바 없지만, 내가 스스로 돌고 돌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다.
생각해보니, 지난 1983년 말경에 종달 선사님께 마지막으로 입실하던 때와 그날 법경 노사님께 입실 하던 때가 마치 데자뷰처럼 느껴진다. 삶에서 롤러코스터 같은 굴곡을 거치면서 입실을 통해 안정을 되찾으며,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는 듯한 희망을 품는다. 다만 종달 선사님께 입실할 당시에는 마치 순간적인 자동증과 같이 나도 모르게 움직이면서도 또렷한 의식이 유지되는 현상을 체험한 후, 밖으로 나와서는 개운하면서도 충만한 마음,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과 찬란한 햇살에 눈부신 외경계들을 생생하게 느꼈다. 그러나 그것을 의식적으로 개념화할 수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그 일련의 현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문이 생겼고, 그 이후로 오랫동안 그것이 하나의 화두처럼 나에게 붙어버렸다.
법경 노사님(저자)께 입실해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강렬한 인상보다는 내면적으로 받은 충격과 함께 너무나 ‘단순한 사실’에 대해서 새로운 눈뜸이 생겼고, 그 이후 우연히 보게 된 선어록들이 이전보다 더욱 생생하게 읽혀지던 기억이 난다.
--- p.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