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본문에 의하면 '어린아이 상태의 그리스도인'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이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3장에서 언급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경우와 함께 이들의 구원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두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어린아이 상태의 그리스도인'은 모두 구원받은 사람들의 병적 유아 상태를 가리키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회심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경험의 성격과 깊이가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좁은 의미에서 회심은 원래 구원에 이르는 단회적인 사건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은 회개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회심은 또한 이미 이루어진 회심의 경험이 새롭게 반복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어느 경우에든지 회심의 깊이와 양식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거듭나는 바로 그 순간에 생애에 잊혀지지 않는 뚜렷한 회심을 경험한다. 거듭남, 곧 중생은 회심과는 달리, 인간의 감지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인간에 의하여 중생하는 순간이 감지될 수 없다. 따라서 거듭난 날을 기억하느지를 묻고 그것을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의 구원을 의심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태도이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중생하는 것을 감지하였다면, 그것은 중생을 감지한 것이 아니라, 회심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그는 중생과 회심을 거의 같은 시간에 경험하였기 때문에, 의식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경험인 회심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회심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중생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모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엔 대부분 중생과 회심의 시기가 다르며, 뚜렷한 회심의 경험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들이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자로서의 경건의 표징이 있는 한, 강력한 회심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마으로 중생을 의심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된 양극단을 경계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강력한 회심의 경험 없이는 구원도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와, 또 한편으로는 회심의 필요성을 실제로 부인하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뚜렷한 회심의 경험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구원 여부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고자 할 대 굳이 그 나무의 뿌리를 뽑아 그것이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아도 때를 따라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보면 그 나무가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듯이, 강력한 회심이 없다 할지라도 그에게 성화의 작용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즉,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결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거룩해져가는 성화의 작용을 통하여 그가 구원받은 사람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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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언약 관계가 구체화됨에 따라 '의'의 개념도 구체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이때, '의'란 언약을 맺은 두 당사자가 이 언약의 관계가 요구하는 바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순종하는 백성들을 하나님 자신의 친백성으로 여기고 보호하시고 축복하시는 특별한 관계를 누리게 하시는데, 이는 이러한 백성을 통하여 자신이 누구신지를 세상에 알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율법이 들어온 이후로부터 '의'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가 부여한 의무들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리고 언약 백성들은 그것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성경적인 '의'는 무엇입니까? 본질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습니다(롬 4:2~5). 그것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것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고백이며,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과 경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절대 의존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불의한 재판장으로 규정하신 이유는 재판을 제멋대로 하고 가난한 과부를 억압하는 불의한 삶 때문이었습니다(눅 18:4~5). 그러나 그가 그렇게 불의하게 살아가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눅 18:2)
요컨대 그 비유에서 지적하는 불의한 삶은 하나님을 향한 오만과 사람을 향한 멸시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한 사람을 '의롭다'고 할 대에 그것이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관념은,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과 경외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조항 하나하나를 준수하는 외면적인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또하나의 좋은 예가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 고넬료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고넬료는 의인이요"(행 10:22). 그는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런 삶을 살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이웃의 궁핍을 보고 물질적으로 도와준 행위 때문만이 아니라 그렇게 베풀지 않을 수 없게 하였던 내면 세계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의 중요한 인물인 노아에 대한 묘사에서도 확인됩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보십시오 만약 하나님의 백성의 의로움이 단지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노아에 대하여 말하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평가는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 시대는 아직 율법이 들어오기 이전이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점들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해명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보시는 바와 같이 율법이 조재하지도 않던 시대에도 이미 의인은 존재하였습니다. (...)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단지 율법의 요구와 일치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비록 연약하고 실패했을지라도 그의 내면 세계가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고 사랑하는 신앙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그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들에게 진실한 참회를 통해 언제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도 이러한 사실을 입증합니다.
--- pp 114~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