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 전승에 따르면, 무명은 진리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가려진 상태이다. 이러한 무명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 마음의 어둠인 무명은 현상의 진실한 본성을 감추고 가린다. 무명은 또한 허위의 모습이나 왜곡(vipall?sa, vapary?sa)들을 만들어낸다. 앞서 말한 고제에 대한 네 가지 왜곡된 생각들이 그것이다. 왜곡들은 세 단계로 작동한다. 첫째로, 우리는 사물을 부정확하게 지각한다. 이것에 근거해서, 우리는 사물에 대해서 잘못된 방식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의 경험을 부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삼법인(三法印)을 이해하면 이런 왜곡들을 없애게 된다. 우리는 삼법인을 배우고,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삼법인을 개념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고, 명상을 통해서 삼법인을 통찰하게 된다.
유가행파와 중관학파에 따르면, 무명은 단순히 알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사실과 다른 방식으로 사물들이 존재한다고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지식이다. 귀류논증파(歸謬論證派, Pr?sa?gika-M?dhyamika)에 따르면, 사람들과 현상들이 내재적으로 존재하거나 그 자체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무명은 실상을 반대로 이해하고, 사물들이 그런 식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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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한 가지 설명에 따르면, (1) 만남을 통한 발생은 원인으로부터 발생하는 결과를 가리킨다. 이것이 인과적 의존이며, 무상(無常)한 사물에만 적용되며, 모든 불교 전통에 공통된다. (2) 의존해서 존재함은 모든 현상이 그 부분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영속적인 현상과 무상한 현상 모두에 적용된다. (3) 의존적 존재는 명칭의 기반과 그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고 명칭을 붙이는 마음 등에 의존해서 단지 명칭이 붙여짐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연기에 대한 또 다른 설명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1) 인과적 의존은 결과가 그 자체의 원인으로 인해서 발생한다는 것을 가리키며, (2) 의존적 명칭에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a) 상호 의존은 현상이 상호 관련해서 상정되었다는 것이며 (b) 단지 의존적인 명칭은, 단지 이름이나 단지 명칭으로서 존재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단지 이름’은 사물이 그저 단어나 소리라는 의미가 아니다(그것은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이 단지 명칭이 붙음으로써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 두 가지 설명에서, 의존적 발생에서 ‘발생’은 원인과 조건으로 인한 발생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존재에 기여하는 다른 요소로 확장된다. 또한, 두 가지 설명에서, 전자의 차원의 연기는 전반적으로 후자의 차원보다 이해하기가 더 쉬우며, 후자를 이해하기 위한 기반의 역할을 한다. 두 번째 설명에 집중하면서, 이러한 차원의 연기에 대해서 더 깊이 살펴보자.
--- p.278~279
유식학파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 의식들에 나타나는, 겉보기에 외부의 대상들은 우리 마음속의 업의 잠재력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이 대상들이 우리 마음과 별개인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지만, 무명으로 인해서 대상들은 그런 식으로 나타난다. 실제로는, 대상들이 나타나는 방식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꿈속의 사물과 비슷하다.
좋고 나쁜 경험들이 모두 우리의 심상속 안에 잠재된 것들로 인해 일어나는 업(業)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중생들과 환경을 바라보는 견고함이 느슨해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친구들, 적들, 낯선 사람들은 단지 업(業)의 모습이며, 그들에 대해서 집착과 분노와 무관심을 갖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마찬가지로, 매력적인 대상과 매력이 없는 대상, 칭찬과 비난, 명성과 악명, 부와 빈곤은 잠재력의 활성화로 인해서 단순하게 마음에 나타난다. 그러한 것들이 마음에 나타난 것과 별개로 존재하는 외부의 존재는 없다. 따라서 어떤 사물에는 매달리고, 다른 사물에는 혐오감을 갖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관학파의 견해에 따르면, 아무것도 자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마음에 의해서 명명된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자기와 남들은 이름표에 의존해서 존재한다.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나’나 ‘남들’은 없고,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고통이나 행복은 없다. 이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고, 따라서 그것들 자신의 내재적 본성[自性]이 없다고 고찰하면,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우리 자신의 행복에 매달리는 집착이 완화된다. 이렇게 해서, 보살행(菩薩行)을 수행하는 우리 마음은 더 용감해지고 즐거워진다.
--- p.358~359
여래장 사상의 의미를 조사하면서, 중관학파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말들을 했을 때 부처님이 최종적으로 의도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부처님이 각 중생 안의 영속적이고, 안정되고, 항구적인 본질에 대해서 말했을 때, 부처님이 의도한 의미는 마음의 공성(空性), 영속적이고 안정되고 항구적인, 본래 갖추어진 불성이었다. 마음에 내재하는 존재가 없고, 번뇌들은 우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성불(成佛)이 가능하다.
부처님이 이것을 가르친 목적이 무엇이었나? 지금은 어떤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미성숙하고, 무아와 공성의 개념이 그들을 두렵게 한다. 그들은 ‘무아’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잘못 생각하고, 공성을 깨달으면 자신들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들의 공포를 진정시키고, 그들이 공성을 완전하고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점차적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32상(三十二相)을 갖춘 영속적이고 안정되고 항구적인 본질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현재의 관념들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말씀한 것이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발생하는 논리적 모순은 무엇인가? 만일 이것이 문학적 가르침이라면, 이것과, 영속적이고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자아를 신봉하는 비불교도들의 주장 사이에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영속적인 본질은 반야류 경전들에 표현된 것처럼, 명확한 의미[了義](내재하는 존재가 없음[空性])와 모순되며, 추론에 의해 반박된다.
--- p.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