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518년 만의 조선 멸망이 알려진 1910년 8월 29일 그 참담한 날, 조선 사람 모두가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까? 새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이완용은 병합 음모를 꾸몄다. 이는 1910년 8월 22일 이른바 ‘한일병합’의 결과로 나타났다.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 이후 518년 만의 멸망이었다. 일제는 병합을 축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다. 경복궁에는 일장기가 걸리고 등불행렬이 시가를 누볐다. 반면 한국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당시 모든 한국인들이 비통해 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종로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장사를 하고 먹고 마시는 ‘일상’을 잃지 않았다. 실제로 그날은 조용했으며, 반대시위도 전혀 없었다. 일제에 모든 실권이 넘어간 상황이라 체념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병합 전부터 일제의 철저한 단속으로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런 이유뿐일까? 민중들에게는 단지 착취의 주체가 바뀐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점심 먹고 오후에 만나자는 식으로 약속하던 조선 사람들 철도가 놓이고 시계가 등장하면서 근대적 시공간으로 들어왔다 기차역에는 어김없이 시계탑이 들어섰고, 기차는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어김없이 출발했다. 각 지역의 시간은 기차 시간을 중심으로 통일됐다. 이런 철도 운행은 시간개념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승객이 비록 양반이라고 해도 기차는 기다려주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출발했다. 이런 기차는 조선 사람들에게 근대적이며 기계적인 시간을 교육시키는 훌륭한 교육자의 역할을 했다. 점심 먹고 오후에 만나자는 느슨한 시간 감각으로는 기차에 오를 수 없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철도와 시간개념에 관한 재담은 흥미롭다. 시골 양반이 화륜차를 타러 가니 차는 반시간이나 있어야 떠난다고 했다.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증을 내자, 인력거꾼이 인력거를 타고 다른 정거장에 가면 곧 떠날 수 있다 하고서 한참 다니다가 그곳으로 다시 데려다놓으니, 그 양반이 인력거 삯이 헛돈이 아니라고 하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