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편지들은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가?(7절) 이 책의 모든 언급을 하나로 모아 보면 명쾌한 답을 얻게 된다. 신생 교회가 맞닥뜨린 주된 도전은 이교도 박해의 위협이다. 사실 이 일곱 편지들은 주님께서 이 교회들을 앞으로 올 더 심각한 일에 준비시키는 일환으로 작성된 것 같다. 그들은 반격을 가하지 말고 인내하는 고난을 통해 친히 승리를 얻으신 주님을 따름으로써 ‘이겨야’ 한다. 이들 교회의 일부는 고난을 겪을 것이다. 일부는 죽을 것이다. 모두 예수님을 인내로 증언하여, 이를 통해 그들을 둘러싸고 위협하는 악한 세력들을 ‘이겨야’ 한다. ---「계 2:1-7 해설」중에서
이 편지의 ‘지역색’은 뒤이어 최고조에 달한다. “너는 ‘나는 부자다! 나는 훌륭하다!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도시 전체의 우쭐대는 부유한 태도가 그리스도인들까지 물들인 게 분명하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일말의 의혹도 남기지 않으신다. 사실 그들은 가련하고 불쌍하다(그렇게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나, 그들의 실상을 보여 주는 두 가지 일반적 표현). 좀더 구체적으로, 그들은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 그들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금이 필요하다. 그들은 예수님만이 제공하실 수 있는 고급 옷(그 지역에서 인기 있던 검은 옷이 아니라 흰옷)이 필요하다(우리는 갓 세례 받은 사람들이 새로운 거룩한 삶에 헌신되었음을 알리며 흰옷을 입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들은 새로운 종류의 안연고가 필요하다. 프리기아의 명물도 그 지역과 사람들의 영적 눈멂을 치료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참담한 내용인데, 지역 문화의 다채로운 메아리로 인해 한층 더 그렇다. ---「계 3:14-22 해설」중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오랜 체스 게임 앞에서, 하나님이 그냥 게임 판을 박차고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게임은 너무 지루하고 복잡해져서, 정신 나간 많은 사람들이 괴상한 일을 너무 많이 저지르고, 너무 많은 고난과 고통과 분노와 폭력이 수반된다. 이제 하나님이 개입해 무언가 해야 할 때가 아닌가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탱크를 파견해서 반대 세력을 전부 휩쓸어 버리셔야 하는 것 아닌가? 그냥 내버려두는 것보다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이런 반대 의견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버린 사람들이나 애당초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간간이 들린다. 이 세상의 공포와 괴로움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그들은 질문한다. 이렇게 뒤죽박죽 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당연히 하나님은 발을 뻗어 반항하는 체스 판의 말을 죄다 불 속에 차 넣어야 하지 않는가? ---「계 6:9-17 해설」중에서
이 단락 마지막 절에는 요한이 지금 묘사한 장면을 묵상하는 그의 냉철한 현실주의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사로잡힐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칼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인생사다. 적절한 반응은, 싫다고 발버둥치지 않고 인내와 믿음을 굳게 붙드는 것이다. 11장은 말 그대로였다. 죽음에 이르는 신실한 증언을 통해 어린양은 승리를 거두고, 하나님의 나라가 괴물의 나라를 대신하고, 용이 자신의 권력의 마지막 부스러기까지 상실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아야 한다. 하지만 요한이 이 대목에서 하는 일은, 교회의 작은 지역적 투쟁이 의미를 갖기 위해, 또 타협하지 말고 증언하라는 도전이 의미를 갖기 위해 배경에 있어야 할 더 크고 암울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우리가 용과 괴물을 기억할 때만,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믿음과 거룩함이 정말 얼마나 지독하게 중요한지 깨닫는다. ---「계 13:1-10 해설」중에서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괴물의 세력에게, 또 그들의 명분을 선전하는 지역의 선동 기계에게 눌려 있다. 마찬가지로, 선량했을 수도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체제가 계속 내놓는 거짓말과 속임수에 넘어간다. 계시록 19장은 전자에게는 약속의 역할을, 후자에게는 경고의 역할을 한다. 일단 예수님이 누구셨고 누구신지, 또 그분이 죽음을 통해 거두신 승리의 의미를 당신이 이해한다면, 최종 결과에 대해 어떤 의문도 있을 수 없다. 괴물 체제는 등장했다가 사라질 수 있다. 거짓말과 속임수는 계속 확산될 것이다. 우리는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왕의 왕이요 주의 주께서 승리하실 것이다. 그 사이에 결코 타협이 없어야 한다. ---「계 19:11-21」중에서
다시 말해 새 세상은 아름다움과 힘, 기쁨, 부드러움과 영광으로 충만하다는 의미에서 현재 세상과 비슷할 것이다. 예컨대 새 세상에서는 땅은 물론이고 하늘(11:19)에도 당연히 존재했던 성전이 폐기될 것이다(21:22).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생각이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성전이 온 우주를 위한 하나님의 거대한 숨은 계획의 예고편 모델이었는데, 이제 마침내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 세상은 현재 세상과 비슷하겠지만, 특히 현재 세상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죽음과 눈물, 그리고 죽음과 눈물을 야기하는 모든 특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계 21:1-5」중에서
따라서 요한의 환상은 새 에덴의 환상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동산이 아니라 도시(city)다. 동산의 모든 요소가 여전히 거기 존재하지만, 도시 안과 주변에서 보존되고 개선된다. 우리는 우리가 이 둘 다에 적합하게 만들어졌음을 직감적으로 안다. 한편에서 시골의 낭만적 전원과 다른 한편 도시 개발자의 꿈은 대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새 창조는 두 가지 비전을 하나로 묶어 둘 다를 변혁하고 치유한다.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될 때, 신부와 어린양이 하나가 될 때, 이 두 가지는 창세기의 이원성이 항상 의도해 왔던 대로 마침내 통합되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동산과 도시도 하나가 된다. 인간은 서로, 또 하나님과 연합하여, 보좌에서 나오는 영광스런 빛을 받으며, 땅과 그 열매 위에 기쁘고 지혜로운 청지기직을 수행할 것이다.
이 궁극적인 미래 환상의 다른 특징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것도 지금 기대해야 한다.
---「계 21:22-22:7」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