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는 아시아 여러 나라 중에서도 가장 뒤늦게 인도 포교사들의 발길이 닿은 곳이다. 티베트 사람들의 개종은 집권 군주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티베트의 토착종교인 본교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으며, 본교의 수많은 측면은 불교의 교리 속으로 흡수되었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다같이 히말라야를 가로질러 이 '설역고원(雪域高原)'에 전해졌지만, 끝내 뿌리를 내린 것은 대승과 인도 탄트라였다.
힌두교의 이신론을 듬뿍 담고 있던 이 두 사상은 티베트인들에 의해 창조적으로 발전되어, '완성된 다르마'인 '금강승'이 된다. 티베트의 많은 사원과 그 종파들은 의식절차와 수행방식이 저마다 달랐으나 정통성을 지향한다는 점만은 일치했는데, 이는 불교의 경전 전체를 티베트어로 옮기는 웅대한 계획에 의해 뒷받침되었으며, 그 결과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산스크리트 불교 문헌들이 오직 티베트어로만 전해지게 되었다. 티베트의 사원들은 또한 회화와 금속공예, 건축에 두루 걸친 불교 예술의 거대하고도 독창적인 전통을 키워나가기도 했다.
티베트의 많은 사원들은 유파에 따라 세부적인 의식과 수행이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정교(正敎)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일치되었다. 이런 상황은 불교 성전을 모두 티베트어로 옮기는 방대한 작업으로 유지되었다. 그 결과 산스크리트로 구성되었던 많은 불교 문헌들은 현재 티베트어로 번역된 것들만 남아 있다. 또한 불교회화, 금속공예, 불교건축을 포함하는 거대하고 원칙적인 전통도 여러 사원들 속에서 싹텄다.
195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 이후 수많은 사원들이 파괴되거나 유린당했으며,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와 같은 야만적 행위가 어느 정도 수긍되어 차츰 나아지고는 있으나, 티베트는 여전히 점령당한 국가이며, 정부와 그 지도자들은 대부분 인도와 서방세계에 망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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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와 얀트라는 탄트라 및 티베트 불교에 사용되는 의식용 도형들로서, 명상의 대상이 되는 우주를 상징적으로 축소한 것이다. 이 도형들은 아득한 고대의 것으로서, 만다라 구성의 이론과 기술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맥을 이어 전해졌으며, 만다라 명상이 인도에서 티베트로 전해진 것은 11세기 무렵이다. 지금도 라마들은 수백년 동안 변함없이 행해진 방식으로 자신들의 지식을 제자에게 전하고 있으며, 현재의 달라이 라마 역시 다른 라마들과 함께 이 면면히 이어지는 가르침의 맥을 잇고 있다.
만다라는 그 중심에 신이 거주하는 저택이며, 불교 만다라의 형태는 일부나마 힌두교 사원 건축의 설계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원 깊숙이 자리한 신의 성소(聖所)에 놓인 신성한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은 힌두교 신앙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부분이다. 참배자는 그 이미지에 몰입하게 되지만, 사원의 통로는 곧바로 성소에 다다르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안마당을 거쳐 신의 도상과 상징적 동물들의 성상들 사이를 지나면 신자는 마침내 주신을 모신 사당에 다다르게 되고, 여기서 비로소 신성한 존재를 직접 대면하는 '득견(得見, darsana)'을 하여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사원 경내를 순례하는 데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다. 그것은 신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것이며, 마음을 가라앉혀 명상을 준비하는 것이며, 온 사방에 두루 스며있는 신성(神性)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신을 향해 나아가는 도중에 만난 모든 상징들은 - 신성의 본질로 흘러드는 삼라만상과 함께 - 신이 그 중심에 있는 우주의 구성요소들을 나타낸다. 여정을 되짚어 오노라면, 동일한 상징들이 이번에는 신성한 창조물의 요소로서 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탄트라 수행은 최근까지도 주로 브라민들에게만 허용되었던 힌두 사원의 수행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점이 많다. 탄트라 의식은 전통적으로 여러 계급이 뒤섞인 비전 수행자들 사이에서 은밀히 열렸으며, 모임의 장소 중에서 성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별도의 사원을 건축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이 거주하는 성스러운 장소는 축소되어 지어졌다. 이 성스러운 공간은 잘게 빻은 쌀이나 조개껍데기 등으로 흙 위에 본떠 그리거나, 보다 영구적으로는 청동으로 도형을 강조하거나 바위에 새겼으며, 종이에 그리기도 했다. 이런 이미지들이 곧 얀트라이며, 그 기하학적인 선들은 주로 진언과 더불어 새겨진다. '내면의 성소(inner sanctum)'를 에워싸고 균형을 이룬 유사 건축공간인 얀트라의 형상은, 그곳에 주재하는 신과 만나는 신성한 공간을 환기시킨다.
만다라 의식에는 여러 수준이 있다. 상서로운 음절인 진언이나 다라니 등을 적어 넣은 형상의 만다라는 초보적인수준으로, 히말라야와 티베트의 불교도들에 의해 오래 전부터 마법의 부적으로 사용되었다. 부적 상자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행운과 건강은 물론, 부적의 마력은 그 소지자를 자연 재해나 초자연적 불행으로부터 지켜준다는 것이다. 사원 의식의 수준에서 보면, 만다라를 짓는 일은 지금도 계속되는 일상적인 행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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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위대한 작가 에머슨과 소로, 그리고 휘트먼 등 세 사람은 인도 신비주의의 북미 진입을 예고한 주요 대변자들이었다. 에머슨과 소로가 윌킨스의 『바가바드기타』를 접했던 1840년대 중반, 『아시아의 빛』또한 그들의 친구인 올리버 웬들 홈스에 의해 "더없이 고결하여 신약성서 이외에는 도저히 견줄 만한 것이 없다"라고 극찬을 받았다. 미국의 대중에게 볼교 문헌을 처음 소개한 사람이 바로 소로였다. 뷔르누프의『인도불교의 소개(Introduction to Indian Buddhism)』을 읽은 그는, 불어판『법화경』의 일부를 번역하여 1844년『다이얼(The Dial)』에 게재했다. 그러나 그의 번역보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월든 호숫가에서 묵상으로 홀로 보낸 시간에 관한 소로의 유명한 이야기이다.
"나는 삶에 탁트인 여백을 두는 것이 좋다. 여름날 아침이면 이따금씩... 나는 동틀 무렵부터 해가 중천에 솟을 때까지 양지 바른 문간에 앉아 하염없는 상념에 잠기곤 했다. 소나무와 히코리와 옻나무에 에워싸여,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고독과 정적 속에서... 나는 그 무렵을 통해 낟알이 여물듯 성숙했다. ...나는 일을 팽개쳐두고 생각에 빠져든다는 것의 동양적 의미를 이해한다..." 『월든』(1854)
월트 휘트먼 역시 인도의 문헌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소로의 명상이 상좌부와도 같은 정적주의와 사회에 대한 초연함을 담고 있었다면, 샤머니즘에서 애니미즘으로, 애니미즘에서 다시 힌두교적으로 변모했던 휘트먼의 시는, 삼라만상을 벗삼으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대승적 친화력을 표현한다. 그는 『내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에서 '나는 사람들의 짝이자 벗'이라고 선언한다. 아울러 모든 존재가 유일하면서도 평등하다는 사실에 매료되어, 그의 상상력은 마치 보살과도 같이 온 우주로 두루 뻗어 나간다. 즉, 그것이 기러기이건, 풀잎이건, 검둥이 노예이건, 구두창이건, 대통령이건, 혹은 '가장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자'이건 간에, 마주치는 모든 것을 열렬히 찬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인도 문헌들을 읽었다는 것을 서슴없이 부인했으나, 휘트먼은 『인도로 가는 길(Passage to India)』속에서 '신비로운 옛 브라마의 본래 생각..., 그리고 자애로운 젊은 부처'에게로 되돌아갈 것을 외친다. 물론, 소로나 휘트먼을 '불교도'로 평가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그들은 단지 부처의 가르침 주변을 지나쳤을 뿐이며, 나름대로 불교가 추구하는 정신적 경향을 표현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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