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도 '모든 것이 좋았던 때'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현실이라는 화폭에 그림을 그리셨고, 그 그림은 완전했다. 인간을 포함한 창조는 흠이 없었다. 우리는 죄 없는 존재들이었다. (... 그러나) 우리는 사랑과 결합 대신 미움과 분리를 느낀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존중이나 감사 대신 시기를 느낀다. 우리는 기쁨 대신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넘치는 경외심과 사랑 대신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이런 모든 느낌은 선악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마약 선악을 함께 공존시킬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기가 힘들 것이다.
우리가 만일 모든 일들을 완전히 좋은 것 혹은 완전히 나쁜 것으로 보는 극단으로 치우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타인과 우리를 둘러싼 제상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질 수가 없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 친구에서 저 친구로, 이 배우자에서 저 배우자로,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혹은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옮겨다닐 것이다. 그들은 잠시 동안은 모든 것이 잘되는 것같이 생각하지만, 나쁜 것이 나타나자마자 그것을 다룰 수가 없다. 그들은 완전함을 요구한다. 완전하지 않은 것은 '모두 나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거부한다.
어쩌면 당신은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인간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귀가 시간이 늦어졌을 때 집에 전화를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신의 배우자는 그로 인해 당신을 문둥병 환자처럼 취급한다. 이것이 바로 타인에게 나쁜 것이나 불완전함이 있음을 다루지 못하는 사람의 한 본보기가 된다. (...) 아니면 당신이 새로 이사온 이웃을 위해 환영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케이크가 땅에 떨어졌고 그로 인해 '모든 저녁 시간을 다 망쳐 버렸다.'
이런 일들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는 문제들이다. 우리가 만일 인생과 잘 타협해서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다 있는 세상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에 대해 희미한 기억을 갖고 있다. 우리는 완전한 '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 볼 수 있다. (...) 우리 삶의 여러 국면에 대해서 이상적인 염원을 갖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일부분이다. 그러한 염원은 내면 속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잠재력이다. 우리가 만일 여자라면, 이상적인 여자에 대해 상상할 수 있으며(잠 31장) 남자라면, 이상적인 남자에 대해 상상할 수 있다(엡 4:14-15). 우리 존재의 모든 면에서 우리는 이상적인 모습을 상상할 수 있고 그것을 소망한다. (...)
(하지만) 실제적인 자아는 실제 우리 자신의 모습이지 우리가 바라는 자신이 아니다. (...) 이상적인 모습은 잃어버린 바 되었다. 우리는 연약함과 타락함 속에 매어 있다. 우리는 망가졌고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롬 7:14)
죄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연약하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이 마치 나쁜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연약한 것이 괜찮다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의 이상적인 모습은 연약하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실제의 자아보다 이상적인 자아를 더 귀하게 여긴다... 우리는 이상적인 자아와 실제적인 자아와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내면에 끊임없는 전쟁이 있게 된다. 실제적인 자아가 뚜렷하게 나타나면, 이상적인 자아는 그것을 판단하고 숨기려고 든다. 우리가 숨게 되면 하나님과 타인과의 관계를 맺지 못한다.(...)
이상과 실제의 이와 같은 분열은 그리스도인의 갈등의 주요인 중 하나다. 교회는 종종 너무 높은 이상적인 모습을 강조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면서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들이 처음에 어째서 그리스도께로 왔는지를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신념이다. 그들은 용서와 용납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이었기 때문에 온 것이었다.
--- pp 246~253
기쁨이나 고통을 느끼는 우리의 신체적 감정도 정서적 감정도 다 우리의 것이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에 책임이 있다. 감정은 우리 상태를 알려준다. 감정은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가 되며, 어떤 변화가 필요하고, 무엇이 잘되고 있으며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 가를 말해준다.
우리 감정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그 감정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가장 파괴적인 일이다. 다윗은 감정에 둔한 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일인가를 보여준다.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NASB성경 번역에는 '저희가 감정을 닫고 느끼지 못하며'로 되어 있음 - 역자 주)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시 17:10)
전도서 저자는 감정을 소유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전 7:4). 자기 감정을 다루지 않는 사람은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과의 '접촉을 잃어버린' 것이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자신의 분노와 증오심에 책임을 지지 않음으로써 부정직한 아첨꾼이 된 사람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감정 있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 궤휼로 그 감정을 감출지라도 그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잠 26:23-26)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사람들에게 자기 감정에 책임을 지라고 명령하심으로써 경계선을 분명히 하셨다. 예를 들어, 각기 다른 시간에 고용이 되고 같은 임금을 받은 일꾼들의 이야기를 보라(마 20:1-15). 제일 이른 시간에 고용이 된 사람들이 주인에게 화를 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감정을 스스로 책임을 지게 하셨고, 주인은 자기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 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그는 근본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네 분노는 네가 책임지고 나를 원망하지 말아라. 너의 분노는 너의 시기심에서 나온 것이니 네가 다루어야 한다."
--- pp 134~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