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시마네현에서 태어났다. 어났다. 1884년 10월에 베를린으로 유학 중, 의학연구를 하면서 서양 철학과 문학 등을 접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귀국 직후 독일 여성인 엘리제 비겔트가 일본을 찾아왔다가 1개월 만에 독일로 돌아갔는데, 이것이 소설 「무희」의 소재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번역에도 힘썼으며(「파우스트」, 「즉흥시인」 등이 유명하다), 「무희」,「청년」,「기러기」,「아베 일족」 등의 소설을 남겼다. 그의 유언으로 어떤 영예, 칭호도 사용하지 않고 무덤에는 ‘신린 타로 묘(森林太?墓)’라고만 새겨져 있다.
1871년 군마현에서 태어났다. 경시청에 근무하던 부친이 세이난 전쟁에서 전사한 후 모친의 손에 어렵게 자라, 서점 사환으로 근무하면서 문학에 뜻을 두고 공부하였다. 1907년 발표한 「이불」은 여제자와의 관계와 감정을 숨김없이 폭로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고백적 취향의 소설적 기법은 이후 일본문학의 독특한 특징인 사소설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생」, 「아내」, 「인연」 등 자신과 주변을 묘사한 작품으로 자연주의 작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다. 만년의 대표작으로 「백야」가 있다.
1878년 대장성 관리인이었던 부친의 장남으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미국 하버드대로 유학을 떠나지만 신앙에 대한 회의를 품고 귀국하여 문학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이때의 정신적 방황과 위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 「미로」가 초년의 작품이다. 이후 나쓰메 소세키와 반자연주의 입장에서 인도주의, 이상주의 문학을 주창하며 백화파의 선두에 선다. 「평범인의 편지」, 「클라라의 출가」, 「돌에 깔린 잡초」 등의 수작을 잇따라 발표하며 인도주의 계열 문단의 총아가 된다. 1923년 별장에서 잡지사 여기자인 유부녀 애인과 동반자살, 생애를 마친다.
1888년 가가와현에서 태어났다. ‘생활이 먼저이고 예술이 다음’이라고 말할 만큼 집이 가난하여 고학으로 고생하였다. 1916년 교토제국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하면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과 교우한다. 1918년「무명작가의 일기」, 「다다나오경 행장기」 등을 당시 권위 있는 『중앙공론』에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신인작가로 발돋움하였다. 1920년 『오사카 매일신문』, 『동경일일신문』 두 개 일간지에 동시 연재된 「진주부인」을 비롯하여 50여 편에 이르는 장편 통속소설로 신현실주의 문학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후 『문예춘추』를 창간하였고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을 제정하여 작가의 복지, 신인 발굴, 일본문학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1892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하에 들어 「노년」, 「라쇼몽」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이후 역사소설로서 역설적인 인생관을 나타내려고 하는 이지적 작풍의 작품을 주로 발표하였다. 합리주의와 예술지상주의 작풍으로 문단을 휘어잡았으나 만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등장 등, 시대 동향에 적응하지 못하고 회의와 초조와 불안으로 심한 신경쇠약에 빠져 자살한다. 그의 동료인 기쿠치 간이 그의 죽음을 기려 매년 <문예춘추사>에서 아쿠타가와상을 시상하고 있다.
1909년 아오모리현에서 태어났다. 생가가 대지주라는 것, 그리고 귀족 출신이라는 점이 그의 생애와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교와 동경대 입학 후 좌익사상의 세례를 받고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후에 이탈하여 그 좌절감을 평생토록 떨치지 못하였다. 자살미수, 마약중독, 정신병원 입원, 애인과의 이별 등 청춘의 방황 한가운데서 『만년』을 발표 했다. 전후 「사양」을 발표하며 젊은이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일약 인기작가가 되었으며, 또한 자신을 삶을 그린 듯한 『인간실격』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1948년 애인과 동반 투신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서울 출생. 국문학을 전공하고 일본에서의 유학, 직장 생활을 거쳐 지금은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점점 멀어지는 당신』, 『도련님』, 『어리석은 자의 철학』, 『일본 산업의 구조』, 『일과 인생의 균형감각』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