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독립적인 사상가는 항상 자신의 세대의 관습적인 지혜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유행과 순응의 덫에 걸려 버린 오늘날의 사상가들과는 달리 히브리 선지자들은 내일과 모레의 사상가인 것이다.
---「서론」중에서
많은 복음주의자가 커다란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오직 현재만 알 뿐 역사에 대한 감각(심지어 자신의 역사에 대해서도)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세속성에 대한 과거의 견해가 사라져 버렸다는 어렴풋한 인식은, ‘두려움의 오류’에 의존하는 것으로 메워져 버렸다. 즉, 한쪽 극단에 대한 두려움이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인용되는 것이다. 새로운 복음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과거 세대의 편협한 세속성의 ‘할 일 목록’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목록’과 ‘해서는 안 되는 일 목록’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의 선조들은 완고한 율법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소한 것에 집착했으며, 세속성을 술, 춤, 그리고 담배로 축소시켰다. 구속하는 세속성으로부터 탈출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은혜를 축하하자.”
---「불가능한 입장」중에서
적합성과 미래에 대한 최근의 기독교의 집착은 너무나 자주 도덕적이고 지성적인 비겁함으로 흘러간다. 진보의 권력과 최신의 것에 대한 유혹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하고, 멋지고 새로운 미래의 도래를 지연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여, 우리는 옳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않고 지속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이미 알고 있지만 입술을 깨물면서 힘없이 함몰해 들어간다. 이 상황은 프랑스 작가 샤를 페기가 한 세기 전에 기록한 것과 같다. “어떤 비겁한 행동이, 새로운 것을 충분하게 따져보지 않으려는 두려움에서 유발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속박에 대한 경고의 울림」중에서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전령들은 그 결과와 기질 양 측면에서 매우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생전에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하였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시가를 물고 있는, 귀족적이고 원기 왕성한 윈스턴 처칠의 모습은 으레 핏발이 선 눈매로 그려지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던 세례 요한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공통적인 장점이 있다. 즉 시대에 대한 분별력, 큰 이익과 시대의 풍조를 거부할 수 있는 용기, 위협적인 불화 앞에서의 인내, 역사와 그 역사 안에서 자신의 나라가 처한 데서 비롯된 감각적인 지혜, 그리고 히브리 선지자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것으로 초월적인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그들의 메시지에 담겨진 권위적 어조 등이다.
---「신실함의 대가」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시대를 잘 알고 계시며, 오직 그분만이 우리 삶과 사역의 결과를 알고 계시듯이 우리 시대의 결과도 잘 알고 계신다. 우리의 ‘실패’가 그분에게는 성공일 수 있다. 우리의 ‘좌절’이 그분의 전환점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의 ‘재앙’이 그분의 승리로 귀결되기도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분의 선물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신실함의 대가」중에서
역사를 모르는 자는 역사를 되풀이하는 저주를 받으리라는 산타야나의 언급은 수많은 방식으로 여러 시대에 걸쳐서 울려 왔다. 그의 언급은 오늘날 다시금 생각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문화적 속박에서 벗어남」중에서
철학자들이 옳다. 깊이 생각해 보면 시간은 돈이 아니다. 여기서 더러운 비밀 하나를 밝히자면, 돈이 시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다 써버린다. 돈을 쓰는 데 시간을 쓴다. 그리고 돈을 축적하는 데 시간을 쓴다. 시간이 인생에서 최종적인 현금이며, 이 세상의 어떠한 돈도 우리에게 추가적인 초, 분, 또는 날들을 제공해 줄 수 없다. 이 광적인 인생을 생각해 보노라면, 이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넘치도록 과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의 횡포를 생각해 보면, 세상은 아직 불충분하다.
---「결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