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병아리가 힘든가봐. 이렇게 조그만 게... 엄마 불쌍해.' 딸이 소리쳤다.
'괜찮아, 죽는 거보담 조그맣게 약한 게 나은 거야.'
부드럽게 딸을 안심시키면서 순례는 끌리듯 베란다로 한걸음 걸어나갔다. 별은 없고 신도시의 휘황한 불빛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순례는 그 불빛과 마주선 채로 혼자 중얼거렸다.
'한번 살게만 해주면 어떻게든 사는 거거든. 한번 살게만 해준다면...'
--- p.38
나는 불길함을 느끼고 있다. 이 집에 들어서는 어떤 것들도 그 생명을 내놓기 전에는 이 집을 빠져 나가지 못 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큰외삼촌과 막내외숙모 그리고 여동생과 나.....우리들의 현존 자체가 할머니의 죽음을 가로막고 있다. 어른들과는 달리 우리가 할머니에게 호의적이지 않다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래층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음 소리는 죽지도 않는 할머니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할머니를 따라 죽지도 살지도 못 하는 자기 자신들의 처지를 슬프고 처량하게 들렸다.
--- p.68
"억울해 언니, 그냥 억울했어. 저 여자는 저렇게 많이 갖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없는가 싶고,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면서……."
사흘 전 일을 마치고 경찰서로 달려갔을 때 동생 정례는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 정례는 도둑이 된 것이다. 동생의 나이 마흔, 중학교 3학년짜리 아이를 둔 에미가 유명상표, 샤넬인지 구찐지 하는, 주인여자의 핸드백을 열 개나 훔친 것이었다. 병신 같은 것, 샤넬이든 구찌든 루이뷔똥이든, 성남 모란시장에 가면 오천원, 만원짜리가 널려 있는데 왜 그걸 훔쳐냈단 말인가. 등신 같은 년, 니가 들면 진짜라도 모란시장에서 산 것 같고, 주인여자가 들면 가짜라도 진짜인 것처럼 보이는 걸 몰라? 왜 바보 같은 짓을 해, 하긴! 마음 같아서야 어린 시절처럼 머리를 쥐어박으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순례는 침만 꿀꺽 삼키고 말았다.
동생 나이쯤이던가, 아니면 그보다 더 전이던가, 파출부 일이 손에 익으면서 순례도 그런 생각을 안해본 건 아니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화장을 하고 노래교실에 달려나가는 은행원의 부인도 있었고, 파출부 나온 순례는 사람도 아니니, 없는 셈치고, 전화기를 붙들고 정부와 밀어를 속삭이던 사업가의 부인도 있었다. 98평짜리 빌라의 여주인은 지갑을 펴더니 잔돈은 하나도 없네, 혼잣말을 하면서 안방에 놓여 있는 금고를 열고 돈을 꺼내주기도 했다. 대부분 순례나 정례 또래의 여자들이었다. 저 여자는 얼굴 어디에 복이 붙었을까. 하루종일 노는 저 여자는 어디서 돈이 저렇게 많이 나올까, 순례는 잠깐 일손을 놓고 주인여자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소고기 안심을 척척 구워먹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카레에 넣은 돼지고기 살점에 고개를 박던 제 아이들 생각에 울컥해졌던 건 그보다 한참 뒤였다.
남편이 살았을 때는 농삿일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먹고사느라 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이들 때문에 아침부터 밤까지 죽도록 일하는데 아이들의 얼굴에는 날마다 그늘이 덮였다.
"왜 그런 얼굴들 하고 있냐 엉? 공부해! 기죽지 말고 살아! 엄마가 니들은 안 굶겨! 무슨 짓을 해서라도 대학 공부까지 다 시켜줄거야. 근데 방은 왜 이렇게 어질러놨냐?"
빗자루를 들어 괜히 아이들을 두들겨패면서 기죽지 말라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이들은 순례의 눈치를 살피며 방구석으로 몰려가 울다 잠이 들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재워놓고, 노느니 벌지 하면서 단란주점에 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성남시내 단란주점에서 아줌마들을 찾는다는 연락이 옆집 성기네를 통해서 오면 그 밤에 화장을 하고 셋이나 넷이서 그리로 갔다. 밤늦게 온다고 화를 낼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밤마다 과부들끼리 둘러앉아 먹는 술, 그 술도 공짜로 먹고 노래도 부르고 이만오천원도 벌고, 나쁠 게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못 가 끝이 나고 말았다. 어느날 허벅지를 더듬는 남자를 뿌리치고 술집을 나와, 분당에 있는 단 두 개의 임대 아파트 단지 앞에서 서지도 않는 버스를 타고 미금역에서 내려 걸어오면서, 순례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 짓은 안해, 내 맘 내키면 까짓거 공짜로 해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싫으면 싫은 거야. 개새끼, 어디다 손을 대, 대길……그러구두 집에 들어가면 마누라하구 애새끼들한테 큰소리치겠지, 생긴 건 꼭 족제비 같은 놈이 감히 이만오천원에 날 어떻게 해보려구? 어림없지, 개새끼. 내가 이 짓을 다시 하면 장순례가 아니다!
먹은 술이 얹혔는지 속이 울컥거렸다. 길거리에 침을 탁탁 뱉으며 걸어가는 순례의 눈앞으로 방구석에서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을 아이들의 어두운 얼굴이 떠올랐다. 그 족제비 같은 놈은 술 처먹고 지랄을 해도 어쨌든 애비가 아닌가. 그런데 내 새끼들, 애비랑 도시락 싸서 놀러도 한번 못 간 내 새끼들, 불쌍한 내 새끼들…… 새끼들 때문에 나는 죽지도 못하는구나! 가로수를 붙들고 꺼이꺼이 울면서 순례는 생각했다. 그래, 공평하지 않다! 공평하지 않아!
-- pp.17-19
"억울해 언니, 그냥 억울했어. 저 여자는 저렇게 많이 갖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없는가 싶고,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면서……."
사흘 전 일을 마치고 경찰서로 달려갔을 때 동생 정례는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 정례는 도둑이 된 것이다. 동생의 나이 마흔, 중학교 3학년짜리 아이를 둔 에미가 유명상표, 샤넬인지 구찐지 하는, 주인여자의 핸드백을 열 개나 훔친 것이었다. 병신 같은 것, 샤넬이든 구찌든 루이뷔똥이든, 성남 모란시장에 가면 오천원, 만원짜리가 널려 있는데 왜 그걸 훔쳐냈단 말인가. 등신 같은 년, 니가 들면 진짜라도 모란시장에서 산 것 같고, 주인여자가 들면 가짜라도 진짜인 것처럼 보이는 걸 몰라? 왜 바보 같은 짓을 해, 하긴! 마음 같아서야 어린 시절처럼 머리를 쥐어박으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순례는 침만 꿀꺽 삼키고 말았다.
동생 나이쯤이던가, 아니면 그보다 더 전이던가, 파출부 일이 손에 익으면서 순례도 그런 생각을 안해본 건 아니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화장을 하고 노래교실에 달려나가는 은행원의 부인도 있었고, 파출부 나온 순례는 사람도 아니니, 없는 셈치고, 전화기를 붙들고 정부와 밀어를 속삭이던 사업가의 부인도 있었다. 98평짜리 빌라의 여주인은 지갑을 펴더니 잔돈은 하나도 없네, 혼잣말을 하면서 안방에 놓여 있는 금고를 열고 돈을 꺼내주기도 했다. 대부분 순례나 정례 또래의 여자들이었다. 저 여자는 얼굴 어디에 복이 붙었을까. 하루종일 노는 저 여자는 어디서 돈이 저렇게 많이 나올까, 순례는 잠깐 일손을 놓고 주인여자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소고기 안심을 척척 구워먹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카레에 넣은 돼지고기 살점에 고개를 박던 제 아이들 생각에 울컥해졌던 건 그보다 한참 뒤였다.
남편이 살았을 때는 농삿일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먹고사느라 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이들 때문에 아침부터 밤까지 죽도록 일하는데 아이들의 얼굴에는 날마다 그늘이 덮였다.
"왜 그런 얼굴들 하고 있냐 엉? 공부해! 기죽지 말고 살아! 엄마가 니들은 안 굶겨! 무슨 짓을 해서라도 대학 공부까지 다 시켜줄거야. 근데 방은 왜 이렇게 어질러놨냐?"
빗자루를 들어 괜히 아이들을 두들겨패면서 기죽지 말라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이들은 순례의 눈치를 살피며 방구석으로 몰려가 울다 잠이 들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재워놓고, 노느니 벌지 하면서 단란주점에 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성남시내 단란주점에서 아줌마들을 찾는다는 연락이 옆집 성기네를 통해서 오면 그 밤에 화장을 하고 셋이나 넷이서 그리로 갔다. 밤늦게 온다고 화를 낼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밤마다 과부들끼리 둘러앉아 먹는 술, 그 술도 공짜로 먹고 노래도 부르고 이만오천원도 벌고, 나쁠 게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못 가 끝이 나고 말았다. 어느날 허벅지를 더듬는 남자를 뿌리치고 술집을 나와, 분당에 있는 단 두 개의 임대 아파트 단지 앞에서 서지도 않는 버스를 타고 미금역에서 내려 걸어오면서, 순례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 짓은 안해, 내 맘 내키면 까짓거 공짜로 해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싫으면 싫은 거야. 개새끼, 어디다 손을 대, 대길……그러구두 집에 들어가면 마누라하구 애새끼들한테 큰소리치겠지, 생긴 건 꼭 족제비 같은 놈이 감히 이만오천원에 날 어떻게 해보려구? 어림없지, 개새끼. 내가 이 짓을 다시 하면 장순례가 아니다!
먹은 술이 얹혔는지 속이 울컥거렸다. 길거리에 침을 탁탁 뱉으며 걸어가는 순례의 눈앞으로 방구석에서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을 아이들의 어두운 얼굴이 떠올랐다. 그 족제비 같은 놈은 술 처먹고 지랄을 해도 어쨌든 애비가 아닌가. 그런데 내 새끼들, 애비랑 도시락 싸서 놀러도 한번 못 간 내 새끼들, 불쌍한 내 새끼들…… 새끼들 때문에 나는 죽지도 못하는구나! 가로수를 붙들고 꺼이꺼이 울면서 순례는 생각했다. 그래, 공평하지 않다! 공평하지 않아!
-- pp.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