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적인 삶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적인 삶입니다. 세상적인 삶에 관한 한 우리는 절대적으로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에 취직하려고 했다가 안되면 다른 회사에 취직하면 됩니다. 또 어떤 대학에 들어가려고 했다가 안되면 다른 대학으로 가면 됩니다. '꼭 이회사여야 한다'거나 '꼭 이 학교여야 한다'고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에 제가 만난 학생은 지방대학 의대를 다니고 있었습지다. 사실 그 대학도국립대학으로서 좋은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재수를 해서라도 서울에 있는 더 좋은 의대로 진학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절대적으로 꼭 그 대학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말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청소년 때 이성 교제를 하면 자기 평생에 오직 그 한 사람밖에 살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그 긴머리 소녀만큼 착하고 예쁜 여자는 못 만날 것 같아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소녀 말고도 좋은 여자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청소년 시절에는 오직 한 사람만 절대적으로 보입니다. 그런 미숙한 이성 교제는 오히려 서로의 성숙을 방해하고 깊은 상처를 안겨 주기 쉽습니다.
세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너무 높은 목표, 실현 가능성이 없는 목표를 놓고 씨름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누군가 그의 목표를 다시 조정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 그러나 신앙적인 삶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적인 삶에서 중요한것들은 전부 얻기 어렵습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목표들은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고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 pp 38~39
사사기 설교를 시작할 때 말했던 것처럼, 사사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각 지파의 가나안 정복사입니다. 그런데 이 정복사는 여호수아 때의 정복사와 달리, 가나안을 제대로 정복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주저앉아 버린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유다 지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파가 이미 차지한 땅에서조차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지 못하고 타협해 버렸습니다.
둘째 부분은, 이처럼 가나안 족속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채 결국에는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된 이스라엘 백성이 억압과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평범한 사사들에게 성령을 부어 놀라운 구원을 이루신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
그러나 사사기 마지막 부분은 이런 부흥의 와중에서도 끝끝내 회복되지 못하 곳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리 침체되어도 성령의 능력만 회복되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살아나지 못하고 결국 잘려 나간 곳들이 있었습니다. 다친 다리가 썩어서 도저히 소생시킬수 없게 되면 아무리 아까워도 잘라 낼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이렇게 잘려나간 두 지파가 바로 단 지파와 베냐민 지파입니다. 단 지파는 우상 숭배로 방했고, 베냐민 지파는 음란으로 망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두 지파의 타락은 모두 레위인의 타락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레위인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성직자나 성직자를 돕는 사람들, 즉 목사나 전도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 지파의 종교적인 타락과 베냐민 지파의 성적인 타락은 바로 이들의 타락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즉 사사기 중간 부분은 평신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큰 구원을 일으킨 역사를 보여주는 반면, 사사기 끝부분은 성직자들이 타락함으로써 이스라엘을 회복 볼가능할 정도로 부패시킨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전쟁에서 다 죽고 600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수술로 치면 사지가 거의 대부분 잘려 나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큰 수술을 받고 난 후에 다시 소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 지파는 다시는 고침받지 못한 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맙니다.
--- pp 8~9
미가가 어머니의 저주를 풀기 위해 자기 집안에 신상을 만들고 아들을 제사장으로세우는 데서만 그쳤더라도 죄의 영향력은 많이 줄어들 수 있엇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먹고 살 것이 없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레위인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소년이 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 우거하였더라. 이 사람이 거할 곳을 찾고자 하여 미가의 집에 이르매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뇨?'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인이 들어갔더니" (17:7~10).
이 레위인이 어떻게 해서 자기 집인 베들레헴을 떠나 미가의 집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해이해져서 십일조나 그 밖의 예물들을 잘 바치지 않으니까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미가는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워 놓긴 했지만, 이것이 바른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은 정통 레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미가는 자기 집에 있는 신당이 좀더 완전한 형식을 갖추기 바랐습니다. 이처럼 미가에게는 제사장이 필요했고, 레위인에게는 안정된 직장이 필요했습니다. 이 두 가지 필요가 맞아떨어짐으로써 개인의 집을 위한 고용 제사장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레위인은 하나님께 고용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로 살긴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한 개인에게 고용되어 그에게 월급을 받고 그 가정의 복을 빌어주는 고용 제사장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 pp 2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