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사토시는 어둑어둑한 방에 있었다. 순간적으로 아직 꿈이 이어지고 있나 싶었다. 그러나 상반신을 일으켜 팔과 다리, 목을 순서대로 움직여본 뒤, 자신이 분명히 깨어나 현실 세계에 있음을 확인했다. 어디 부딪히지나 않았나 걱정했지만 몸은 의외로 자유롭게 움직였고, 통증을 느끼지도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더니 어스레한 그 방은 아무래도 창고인 것 같았다. 사토시는 서가와 서가 사이의 좁다란 통로처럼 된 곳에 놓인 긴 의자에 드러누워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편의점에 있었고…… 그렇지, 괴상한 사내에게 팔을 붙잡혔었지……. 그렇다면 여기는 편의점 창고인가? 그 영감쟁이는 대관절 뭐야? 촐랑이 같은 옷차림 하고는…… 그 자가 나를 어떻게 했지? 별안간 쓰러지고 말았던 것 같은데…… 뭐, 됐어. 어쨌거나 난 무사한 것 같고, 바깥이 조용한 걸 보면 그 자는 경찰에게라도 끌려갔겠지. 그런데 내가 얼마나 잠을 잤을까, 지금 몇 시야?’
--- p.15~16 <알로하셔츠를 입은 사내> 중에서
사토시는 순간 자신이 무언가 터무니없는 잘못을 저질렀나? 예컨대 책을 마지막 페이지에서부터 거꾸로 읽었다든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책을 읽고 있었다든지 하는 불안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책은 분명히 《로켓 아기원숭이》였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사토시는 계속 책을 읽어나갔다. 이따금 모여든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다들 변함없이 열심히 듣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사이에 주부의 뒤쪽에는 또 두 명의 회사원이 우뚝 서서 사토시의 낭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조지 역시 세상에 태어나서 오늘만큼 기쁜 날은 없었습니다.”
다 읽고 나자 책방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어느 누구도 어떤 말도 하려 하지 않았다.
‘대관절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어떤 잘못이든 용서를 빌 테니까 누가 좀 빨리 가르쳐줘!’
사토시가 조바심을 내면서 반응을 기다렸다. 다음 순간, 어린이들이 일제히 사토시를 향해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 박수에 이끌리듯이 주부와 회사원들도 만족스러운 표정의 웃음 띤 얼굴로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 p.44~45 <천국의 책방> 중에서
“나는 책이 지긋지긋하다고요!”
유이는 고함소리와 동시에 손님과 사토시를 거칠게 밀쳤다. 그녀는 두 사람이 비틀거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앞치마를 벗어던지더니 창고로 향했다. 유이는 꽝, 하고 가게 전체가 울릴 정도로 세차게 창고 문을 닫았다. 남겨진 두 남자는 험악한 기세에 눌려 한동안 입을 꾹 다문 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중략)
사토시는 원래 유이를 달랠 마음이었다. 그런데 유이의 얼굴을 쳐다보는 사이에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유이의 눈동자는 참 예뻐. 불가사의한 색깔을 띠고 있어서.”
그러자 유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어 무표정 그 자체가 되었다. 사토시는 스스로도 자신의 충동적인 이야기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그런 유이의 표정을 보고 그녀 역시 평소답지 않게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추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잠시 후 유이가 가만히 몸을 일으키더니 있는 힘을 다해 사토시의 따귀를 때렸다.
--- p.58~60 <울보 붉은 도깨비> 중에서
“앞으로 내가 나타나게 되면 모처럼 친해진 인간들과 다시 헤어지게 될 거야. 그래서 나는 길을 떠나기로 했어, 영원히 너를 잊지 못할 거야.” 푸른 도깨비가 남긴 편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와 함께 있던 사내는 그 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사토시가 책을 다 읽자 사내는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할머니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도 사내에게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사토시는 알록달록한 셔츠를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있던 그 사내가 헤어지면서 “또 만나자, 꼬마야!”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붉은 도깨비는 말없이 편지를 읽었습니다. 두 번, 세 번 되풀이해서 읽었습니다. 문에 손을 짚고 얼굴을 댄 채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 p.66~67 <울보 붉은 도깨비> 중에서
유이가 도중에 말을 막았다.
“난 이제 여기서 없어지게 돼. 너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고 말아.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
사토시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만…….”
유이가 가만히 사토시의 왼손에 자신의 오른손을 포개었다.
“그렇지만 나도 똑같이 느끼고 있어. 솔직히 나 역시 지금 심정을 털어놓고 싶어!”
그렇게 말한 뒤 이번에는 유이가 고개를 숙였다.
“현세에 돌아가게 되면 유이를 찾을 거야!”
사토시가 자신의 손 위에 살그머니 얹혀 있는 유이의 오른손을 힘껏 쥐었다.
“그건 무리야.”
“아니야, 반드시 찾아내고 말 거야!”
“설령 네가 찾아내더라도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할 거야.”
“알 거야. 분명히 알아볼 거야!”
오랫동안 두 사람은 그냥 그대로 입을 다문 채 서로의 손을 쥐고 연못을 바라보았다.
--- p.110~111 <마지막 낭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