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대로 되지 않는, 우연에 의해 조롱당하는, 자신을 초월하는,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고 단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태와 마주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새롭게 기대나 바람이나 기도를 담아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단념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 아마도 그곳에 ‘기다림’은 성립한다. --- p.20
저항심에 부글부글 끓어오른 믹 재거는 무엇이든 거꾸로 하려고 했다. 장소는 서해안을 택했다. 평소 이들의 공연은 티켓 값이 지나치게 비싸기로 악평이 자자했지만, 이날만큼은 아낌없이 무료입장으로 정했다. 경비로는 난폭하기로 소문난 헬스 앤젤스를 고용했다. (중략) 끝끝내 사망자가 나올 무렵, 믹 재거를 비롯한 롤링스톤스 멤버들은 트레일러 속에서 카나페를 먹으며 마리화나를 피우고 샴페인을 마셨다. 마지막 무대가 펼쳐질 시간이 벌써 한 시간 반이나 지나 있었다. --- p.47
미야모토 무사시도 이 포령이 알려놓은 시각에 시모노세키 해상 운송업자의 저택에 드러누워 있었다.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주인에게 낡은 노를 하나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사사키 고지로가 허리에 차는 3척 1촌 2분의 긴 칼보다 더 나은 나무칼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2시간을 들여 무사시는 노를 4척 1촌 8분으로 깎아냈다. 그러고 나서야 나룻배를 타고 섬으로 향했다. 사사키 고지로는 진시 상각보다 반각 전(오전 7시)에 이미 섬에 당도해 있었다. 반면 무사시가 도착한 것은 사시(巳時) 하각(오전 11시)이었다. --- p.51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서는 ‘기다리게 함?기다림을 당함’이 성립하는 관계의 일환으로서 자신도 그 관계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기다림을 당하는 사람은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다리게 함?기다림을 당함’이라는 관계는 그리 손쉽게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누군가와 누군가 사이에 기다림을 둘러싼 관계가 깨끗하게 마무리되는 일은 없다. 타자와의 관계는 실로 온갖 ‘기다림을 당하는 일’로 찢겨지고 상처 나는 것이 통상적이다. 기다림에 ‘수취인 불명의 딱지’가 붙어서 돌아오는 일 역시 통상적이다. --- p.65
버려지거나 내팽개쳐진 상태에 놓인다는 것은 상대의 의식 밖으로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그 사람의 안중에는 더 이상 내가 없다. ‘나’라는 사람은 털끝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이 ‘나’를 짓밟는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내게 있어 관계 중의 하나, 즉 ‘one of them’이라면 거꾸로 내 쪽에서 먼저 인연을 끊겠다고 마음속으로 되뇌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사람과의 관계가 ‘나’라는 존재에 결정적이라면, 내 존재는 그 사람의 손에 의해 기각당한다. 그 사람은 기각했다는 의식조차 없는데도 …. --- p.70
친밀한 사이라면 좀 더 원활하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천만에! 오히려 반대다. 생각이 꽉 막혀 있을 때는 ‘말해봤자 알아줄 리 없어’라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해 입을 꾹 다물고 만다. ‘음, 음’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면, 이번에는 ‘뭘 안다고 쉽게 이해하는 척하지’ 하는 반발이 앞선다. 이야기하는 쪽이 완고해지면 들어주는 쪽도 이야기를 듣는 동안 ‘마음은 알겠지만 알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고집이 생긴다. 가족 관계라면 ‘빨리 있는 그대로 털어놓으라’고 재촉하는 말을 듣는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당장 대갚음이 돌아온다. ‘차라리 말하지 말걸…’ 하는 후회가. --- p.87
데리다가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의 뒤를 잇듯 말한 바를 인용하면, “타자를 부르는 일은 응답에서 출발해야 비로소 부르는 일이 된다. 응답은 부름보다 앞서며 부름보다 먼저 (불러준 것을 받아들이려고) 찾아온다.”고 할 수 있다. 타자를 부르는 일보다 선행하는 응답으로서의 기다림을 우리는 지금 문제 삼고 있다. ‘타자가 대답하는 예[oui]’에 선행하는 ‘타자를 향한 예[oui]’를 말이다. --- p.167
럭키에게 지시를 내려주는 포조와 같은 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에 전면적으로 종속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재하는 고도에게 언제까지나 ‘부재’라는 최후의 통고를 내릴 수 없다. 종속이라는 형식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렇다고 방기할 수도 없는 이상 거울 같은 2인조와 만나더라도 가능한 것은 변함없이 시간을 죽이는 일뿐이다. --- p.197
지긋이 기다리는 열림이 의식을 연다. 무언가 나에게 작용을 걸어주는 장을 연다. 기다리고 맞이해준다는 이 열림이 ‘내’ 존재의 시원을 열어주는 작용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사람은 이미 고도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기다리는 고도는 기다릴 것도 없이 이미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까 인용한 『떠들썩한 천지』에는 이런 말도 있다. “때를 기른다. 깊은 상처도 원숙한 주름으로 바꾸는 때라는 것 을….” 여기에서 나는 ‘기른다’는 타동사가 아니라 ‘자란다’는 자동사로 같은 일을 표기하고 싶어진다. 때가 미끄러지는 일도, 때를 쫓아가는 일도 없이 때가 자란다. ‘기른다’고 하기보다는 ‘아아, 자랐구나’ 하는 감각이다. 자녀 양육이나 교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일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무수한 보이지 않는 행위의 쌓임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되풀이할 것까지도 없다.
--- p.213~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