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빌리는 몇몇 사람이 주장하듯 실제로 시행되지 않은 고대의 한 민족에게 배타적으로 속했던 폐기된 방식의 집합이라기 보다는, 현대적 삶의 복잡한 문제들과 우리 시대 도전들에 대한 매우 체계적이고 생명력 있는 응답이라는 것을, 또는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또한 나는 주빌리 지침이 오늘날 세상에서 종교적 실존을 위한 심오한 함의를 내포하는 포괄적인 영성으로서 자격이 있음을 확신한다. 주빌리는 일상성(dailiness), 육체(flesh), 그리고 생명(blood)에 주목하는 영성으로, 내가 간단히 정의하는 영성, 곧 “창조의 핵심인 신비에 비추어 세상에서 존재하는 방식”임을 나는 믿는다. --- p.25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로서, 공동체로서, 국가로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부름’(call), 즉 종교적 소명의 실재에 관해 인식하고 있다. 이 소명에서 실패하거나 벗어나면 두려움, 정체(stagnation), 그리고 폭력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소명이 건전할 때 창의적인 능력의 사용으로 인하여, 해방과 연결됨, 그리고 우리 자신과 자신 너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을 요구하는 에너지가 된다. 주빌리와 가장 상응하는 것으로 내가 건전한 종교적 소명이라 부르는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 깊숙이 존재한다. 종종 창조 설화에서 제시되는 이 소명은 그 자체가 예술적 상상력의 결과이며 유대교 전승 안에서 틱쿤 올람(tikkun olam, 세상을 수선하기)으로 묘사되어 있다. --- p.48
그러나 현존에 관한 심상(imagery)은 존재의 신적인 방식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신적인 존재(Divine Being) 그 자체이다. 하나님을 ‘파악하기 어려운’ 현존으로 기록한 사무엘 테리엔(Samuel Terrien)은 언약의 주제란 성서신학에서 부수적인 반면에, 현존에 관한 주제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현존을 확대시켜 신학적 필수 요소로 삼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이란 선택된 민족에게 여호와가 현존하려고 먼저 선택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언약을 세울 수 있다.22 그런 다음 테리엔은 히브리인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항상 있었던 하나님을 인식하며 안식일을 제정했다고 언급하면서, 현존의 하나님을 안식일의 제정과 연결시킨다. 그들이 그 일을 했을 때 안식일은 그들의 하나님의 성례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 그들의 하나님 현존의 성례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 p.72
자신의 아들이 살해당한 저녁, 르블랑은 보안관 대리인들과 함께 도착해서 그의 아들인지 확인하기 위해 시체가 놓여 있던 사탕수수 밭을 통과해 걸어갔다고 말한다. 그는 열일곱 살 소년 옆에 무릎을 꿇고, “총알처럼 튀어나온 그의 두 작은 눈을 가지고 그곳에서” 주기도문으로 기도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는 말에 도달했을 때 그는 멈추지도 얼버무리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는 “누가 이 일을 저질렀든지 나는 그들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르블랑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프리진은 “통한의 느낌과 복수를 잘 극복하려는 것은 분투임을 그는 인지한다. 특히 르블랑이 데이빗(David)의 생일을 해마다 기억하고 20살의 데이빗, 25살의 데이빗, 결혼한 데이빗, 다리 주변에 있는 자신의 자녀와 함께 뒷문에 서 있는 데이빗, 그가 절대 알 수 없는 장성한 데이빗을 기억하고 또 다시 그를 잊을 때,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는 용서란 절대 쉬운 것이 아님을 배웠다. 매일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분투해야만 얻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 p.119
자신들의 삶 속에서 주빌리에 대해 언급하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단순하지만 설득력 있는 실례를 제공한다. 이런 궁핍한 세상에서 두 채의 집을 소유하는 것을 역겨운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과 남편은 두 번째 집을 팔았다고 나에게 말했던 여성, 자신의 아이는 아니지만 다른 가난한 가정의 아이 교육에 투자하기 위해 주식과 채권을 포기했던 부부, 무료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에게 이런 서비스를 가능하게 만드는 우리 지역 무료급식소의 변호사들, 모든 방문객을 신으로부터 온 대사들로 맞이하고 자신들은 밖에서 자고 손님들에게는 흙마루의 가장 좋은 자리를 양보하는 엘살바도르 농부들.
이런 모든 이들은 ‘지구는 주님의 것’임을 자각하고 있고, 이를 존중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돌려주는 방법을 발견했다.
--- p.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