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은 염불이 아닙니다. 심리 치료를 위한 자기 최면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그런 생각을 갖고 그렇게 사용한다면 그것은 기도를 가르쳐 주셨던 주님의 마음을 크게 곡해한 것입니다. 주님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은 그 문장들을 외워서 염불처럼 암송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기도를 통하여 고백하고, 선언하고, 소원하고, 결단하여 살라고 주셨습니다. 암송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신자의 생활용으로 주신 것입니다. ---「저자 서문」중에서
저 바리새인과 이 세리가 각각 기도한 결과가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한 기도문의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바리새인과 세리가 서로 기도문을 바꾸어서 기도했더라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운명도 서로 뒤바뀌었을까요?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본문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내용으로만 놓고 보면 바리새인이 한 기도의 내용은 우리도 매일 그렇게 하고 싶을 만큼 수준 높은 신앙의 실천입니다.
---「01 기도를 가르치시는 이유」중에서
예수님의 의도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신 아버지이시지만, 동시에 너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으신 아버지입니다. 결국 우리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신 아버지이십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위험 가운데 하나가 기도를 철저하게 이기적으로만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기도를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하여 하지 말고, “우리”에 관심을 갖고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02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중에서
주님은 우리가 드려야 할 간구의 첫 대목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름 자체에 거룩한 이름이 있고, 속된 이름이 있고, 복된 이름이 있고, 빌어먹을 이름이 있고 그럴까요? 이름은 그저 쓰기 좋고 부르기 좋으면 그만입니다. 이름 자체가 복을 불러 오거나 저주를 불러 오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름 자체가 거룩하거나 속되거나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다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다는 것이 인정되고 받아들여지고 고백되게 해달라고 간구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02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중에서
우리는 기도할 때 나무나 자주자주 하나님의 뜻을 꺾고 나의 뜻을 고집 부려서 이루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잘 설득하여 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닫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04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중에서
무엇보다도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그것이 우리 하루하루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오늘이라고 하는 현재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현장으로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만이 갖는 오늘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오늘 여기서 살아내기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이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먹을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06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중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선행이나 덕행이기 전에 책임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빚 갚기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용서에 대한 당연한 반응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도무지 용서가 안 될 때는 “내 마음을 너그럽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어떤 용서를 받았는가를 절절히 느끼고 실감할 수 있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자기가 하나님께 어떤 용서를 받았는가를 실감할 때 그것에 대한 당연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자연발생적이고 필연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인격이나 덕이나 선행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입니다.
---「08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2)」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