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상영 시간이 다섯 시간 넘는 영화 '나사렛 예수'의 감동과 충격을 토대로 하여 썼다. 은혜로운 안토니 버거스의 시나리오를 단지서술체로 바꾸기만 하면 되었다. 몇몇 사람들은 예수의 일생을 영화화한다는 사실을 불경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예수역을 맡을 만한 배우가 이 지구상에 없다는 점에는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대신 영화를 보고서 무언가를 얻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책을 쓰는 것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또하나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모든 세대는 나름대로 배움의 방식이 있다.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는 대체로 활자 매체인 책에 의존해 왔다. 이 방법은 차츰 영상을 통한 배움으로 모습이 바뀌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종래와 달리, 뛰어난 장면 구성으로 효과적인 전달을 시도했다. 예수의 생애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여, 가장 뛰어난 이해의 수단임이 분명한 시각적 접근과 이해를 꾀했다.
이 책에서 예수의 생애는 단순하면서도 솔직하게 소개된다.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흥미를 불러일으키려는 시도가 전혀 없다. 예수의 일생이 꾸밈없이 묘사되어 큰 감동을 준다. 이 책과 영상을 본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복음서를 다시 읽고 싶어할 것이고, 만약 그렇게 한다면 복음서를 읽는 순간 새로운 지식과 선명한 인상을 접할 것이다.
이 책이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동시에 그들의 삶에서 예수를 새로이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었으면 하는 것이소망이다. 우리는 예수를 잘 아는 듯하지만, 실제로 '예수가 누군가?' 하는 질문에 맞닥뜨리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머리말 중에서
십자가형을 받게 될 죄인은 로마의 관계렝 따라, 자신이 못박힐 십자가를 지고 처형 장소로 가게 되었다. 예수는 머리를 죄는 가시 면류관을 슨 채, 무거운 나무 형틀을 메고 가야 했다.
십자가는 관사의 뜰에 있었다. 그 뜰에 들어섰을 때, 예수는 육신의 고통보다 견디기 어려운 마음의 고통을 느꼈다. 그것은 추억 때문이었다. 줄지어 놓인 연장, 차곡차곡 쌓여있는 목재들, 발에 밝히는 나무 부스러기, 정겨운 나무 냄새... 이 모든 것이, 아버지 요셉의 목공소에서 자유롭게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머나먼 나사렛의 벌판 끝을 바라보곤 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나게 했다. 지난날에 대한 추억들이 예쑤의 가슴을 후비고 있었다. 이제 그는 마지막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
극심한 고통 때문에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예수는,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갈보리로 향했다. 이 비극적인 행렬이 예루살렘의 둥근 문을 통과할 때, 니고데모는 기둥 뒤에 서서 예쑤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가 고통스럽게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이, 늙은 니고데모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니고데모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이윽고 예수가 니고데모를 알아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자, 병사가 잔인하게 발길질을 하며 예수를 앞으로 밀쳤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손을 움켜쥐고 통곡을 터뜨렸다. 성경의 한 구절이 그의 마음을 스쳤다.
'그가 곤욕을 당하면서도 침묵을 지켰으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깍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야 53:7)
날이 몹시 더웠다. 구리를 두드려 펴 만든 둥근 지붕 위로 뜨거운 햇볕이 화살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어디선가 구슬프고 낮은 음성이 들려 왔다. 예수의 비극적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던 니고데모가 이사야의 예언을 외우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멸시와 천대를 받고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그를 외면하고 우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질병을 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슬픔을 당하였으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가 우리의 죄 때문에 찔림을 당하고 상처를 입었으니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
우리는 다 길 잃은 양처럼 제각기 잘못된 길로 갔으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면서도 침묵을 지켰으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 (이사야 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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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거친 팔레스타인의 작은 동네지만, 아주 촌 동네느 아니었다. 동네 뒷동산에 오리기만 해도, 대상들이 낙타를 몰고 이집트에서 다메섹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줄지어 가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또 지중해에서 파르티아(Parthia) 인근 지역에 이르는 황폐한 동쪽 길로 장사꾼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로마 제국의 동쪽 경계선을 지키는 로마군의 제식 훈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지중해의 푸른 바다 물결이 넘실대는 것을 보게 되며, 이집트와 그리스와 로마로 항해하는 배들이 망망한 바다 위에 작은 점들로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사렛의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그곳 젊은이들로 하여금, 먼 곳을 동경하고 원대한 꿈을 꾸게 했으며, 식민지라는 정치적 상황은 나이 든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의 꿈, 즉 유대인의 메시아가 나타나 전세계 모든 나라들이 그 메시아 앞에 무릎을 꿇는 황금 시대의 꿈을 꾸게 했다.
그러한 희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어떤 사람들은 막강한 힘과 권력으로 전세계를 지배하는 유대인의 왕인 메시아를 바라고 있었으며, 또다른 사람들은 사랑과 진리, 자유를 바탕으로 하여 세계를 평화롭게 이끌어 갈 메시아를 꿈꾸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억압받는 식민지적 현실과 로마군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투쟁해 주는 메시아를 꿈꾸고 있었다.
메시아가 오신다는 미래에 대한 논쟁은 도처에 일고 있었다. 랍비인 예후다가 그 선두에 있었다. 조던처럼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일찍이 포기해 버린 회의론자들도 있었다. 선지자들은 사라진 지 오래고, 그들의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은 단지 우스갯소리로 여겨졌다. 그러나 랍비가 말한 것처럼, 소망 없는 미래란 별들이 사라진 밤과 같았다. 예후다는 새 시대의 여명을 선포하게 될 표적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때 소경의 눈이 뜨이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가 기뻐 외칠 것이다." (이사야 35:5~6)
더 놀라운 예언은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마태복음 1:23)였다.
예수가 태어날 무렵에는 헤롯 왕이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나타난다는 메사안 주변 인물들에게 왕좌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망상 때문에 거의 미치광이가 되어 있었다. 측근들에 대한 그의 병적인 의심은 아내와 어머니, 아들을 살해하려는 광적인 충동으로 이어질 정도였다.
로마 황제는 "헤롯의 아들(huros)이 되기보다는 헤롯의 돼지(hus)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라는 말로 헤롯의 병적인 권력욕을 비꼬았다. 헤롯은 로마의 비호 아래 정치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게다가 그는 순수한 유대 혈통이 아니기에 더 미움을 받았다.
민심을 얻지 못한 헤롯은, 유대인의 성전을 화려하게 재건해 줌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는 일은 조금도 묵과하지 않았고, 선지자라고 불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찰 대상으로 삼았다. 선지자의 메시지가 조금이라도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어떻게 해서든 침묵하게 하거나, 때에 따라서는 가차 없이 죽이기도 했다. 민중으로부터 메시아라고 불리는 사람은 즉기 제거되었다.
--- pp 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