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僧(상가)은 출가자 다수가 모여 만든 인간집단으로 매우 구체적인 존재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의도가 아닌 그 사회 전체가 형성해가는 일종의 공유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이 승단은 율장이라고 불리는 규율에 의해 운영됩니다. 2500년 전 고대 인도에서 만들어진 이 율장은, 현대적 시점에서 보아도 칭찬할 만큼 훌륭한 법률체계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현대 사회에서 통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많은 모순이나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은 것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 여러 나라의 불교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p.5
일본불교는 천년 이전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승단이 없는 불교’라고 하는 매우 특수한 세계가 되어 버려, 그것이 현대에까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독가스로 많은 사람들을 살해한 옴 진리교도 그러한 어두운 그림자의 하나입니다. 바른 승단을 갖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그 나라 불교에 있어서, 그리고 그 국가 전체에 있어서 커다란 불행인 것입니다. 다행히도 한국에는 율을 엄수하는 바른 전통이 남아 있어, 그 덕분에 한국불교에는 일본불교가 직면하고 있는 것과 같은 위험성은 아직까지는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래의 율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하는 극단적 전통주의의 경향이 한국불교의 근본을 갉아먹고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p.7
다양한 불교집단 속에서 석가모니 이후의 교단 형태를 잇고 있는 진정한 교단은 어떠한 것인가. 이 물음을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불교를 표방하는 숱한 섬 사회에 의해 농락되어 온 일본 사회가 해결해야 할 첫 번째 과제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다방면에 걸쳐진 일본불교의 다양성은 불교가 본래 어떠한 특성을 가진 수행 사회였던가 라는 기본적인 물음에조차 답하기 어렵게 한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석가모니가 계획하고 설립한 섬 사회가 본래 어떠한 형태였는지, 출가에 의해 그 세계에 참여한 사람들은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어떠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는지에 대해 밝혀야 한다. 또한 그 후 계속해서 발생해 가는 모든 불교 교단을 각각 비교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 교단이 정말로 석가모니가 만든 불교 교단의 후예인지, 아니면 현대 불교의 다양성을 숨기기 위한 수단으로서 만들어 낸 사이비 교단인지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석가모니 교단의 참 모습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p.20
불교 승단이라고 하는 섬 사회는 물질적 생활 기반을 속세에 완전히 의지하는 것으로 존속되고 있다. 속세의 호의가 끊어진 시점에서는 어쩔 수 없이 소멸할 수밖에 없는 특성을 가진 사회이다. 이것은 불교 승단의 상황을 고려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다.---「1장 불교 승단의 성립과 구성」중에서
이처럼 일반인→재가신도→사미→비구라고 하는 형식은 후대에 성립된 것이기는 하지만, 각 단계의 의식은 그보다 먼저 완성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사미가 비구가 될 경우, 즉 수계를 할 때에는 백사갈마 수계라고 하는 복잡한 의식이 집행된다. 그 백사갈마 수계는 일반인→재가신도→사미→비구 코스가 확립되기 이전, 즉 사미가 아닌 사람도 비구가 될 수 있었던 시대부터 쓰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오래된, 어쩌면 석가모니 시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된 형태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3장 출가의식」중에서
초기 불교 승단은 당시의 사회가 요구하는 활동에 종사해야 하며, 항상 사회의 존경에 보답하는 집단이어야 했다. 이것은 불교가 보시에 의해 살아가야 하는 집단으로 형성된 이상은 변하지 않는 원칙이다. 그리고 승단이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제어하기 위해 율장이라고 하는 것이 제정된 것이다.
만약 현대에 이 규칙을 적용하여 병자의 출가를 거부했다고 한다면, 불교는 사회의 존경을 잃게 되어 결국 파멸하게 될 것이다. 불교가 섬 사회로서의 승단을 만든 것은 안정된 상태에서 수행에 전념하기 위한 장소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고대인도 사회에서는 이러한 장소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차법이 설정되었다. 차법에 의해 일반 사회와의 알력다툼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차법은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하며, 목적은 승단 사회의 유지에 있다.---「4장 차법」중에서
상가아라마와 현대 사원건축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가람 건축보다도 오히려 일본의 일반사원을 비교의 대상으로 하는 편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보통 절은 법당과 요사채로 나뉘어져 있다. 법당은 본존불을 모시는 건물, 즉 붓다 숭배를 위한 시설이며, 요사채는 사원 내에서 생활하는 자들의 생활공간이다. 본래의 불교 승원은 이 가운데 요사채만 있고 법당은 없었던 것이다. 재가신도들은 불상에 예배하기 위해 승단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숭배한 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지켜가며 수행에 전념하는 출가자들의 모습이며, 또한 그들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붓다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5장 승단의 시설」중에서
승단의 지주화는 오래된 율에는 나오지 않는다. 스리랑카 상좌부의 경우에 기원후 4~5세기의 자료에서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새로운 운영 시스템이다. 승단이 지주가 되어 안정된 식료 공급원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정주자도 늘어나고 승단의 규모도 더욱 커질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세간에 의지해서 살아간다고 하는 불교의 기본원칙이 무너져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승단이 일반 사회의 상식을 무시하고 기이한 활동에 치닫게 될 위험도 따른다. 설령 승단이 자활집단이 되었어도 율만 착실하게 지키고 있으면, 사회상식에서 일탈할 위험은 없다. 하지만 그 같은 상황에서 일단 율 규제가 풀어지게 되면 석가모니의 이상과는 닮았어도 결코 닮지 않은 기묘한 종교 집단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다. ---「6장 일상생활」중에서
율 규칙에 의해 세간과의 원활한 공존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불교 승단이지만, 수행이라고 하는 본래 목표를 잃어버릴 만큼 신도와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신도 중에는 너무 열심인 나머지 자기 생활도 돌보지 않고, 무모하게 기부를 계속하는 사람도 있다. 가업이 기울든지,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든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승단에 보시하는 것에만 열중하는 독실한 신도들이다. 이런 이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석가모니 시대에도 이러한 신도들이 있었으며, 그 대처방안 또한 강구되어 있었다. 승단의 결의사항으로써 그러한 집에는 가지 않도록 하여 신도가 무리하게 보시하지 않도록 신경 썼다. 받을 수 있는 곳에서는 얼마든지 받자는 식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사회의 자산을 강탈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7장, 승단과 일반 사회와의 관계」중에서
불교 승단에서 출가한 자는 금전을 갖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최소의 필요한 물자만으로 생활한다고 하는 원칙에서 본다면 당연한 일이다. 설령 재가인이 보시로 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받을 수는 없다. 이것을 위반하고 금전을 받았을 경우에는 닛사기야-빠찟띠야(nissaggiya-p?cittiya)라고 하는 죄가 된다. 닛사기야-빠찟띠야란 규정 외의 물자를 소유했을 경우에 해당되는 죄로, 이를 범한 자는 승단 전원 앞에서 사죄하고 부당하게 소유하고 있었던 물품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7장, 승단과 일반 사회와의 관계」중에서
승단 운영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 것은 그 내부가 외부사회에 완전히 열려 있다고 하는 점이다. 보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외부 사람들이다. 또한 그 판단 기준은 상대가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나 없나.’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내실을 알지 못한 채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석가모니의 승단은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의 방문객에게 문을 활짝 열고, 스스로의 생활을 누구에게라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7장, 승단과 일반 사회와의 관계」중에서
원래 남성만의 공동체로서 출발하여 그에 맞게 조직을 운영해 가던 불교 승단이 신참자로서 여성 출가자를 받아들이게 되고 다방면에 걸친 조직 변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뒤늦게 들어온 여성 수행자가 선배인 남성 수행자의 지휘 하에 들어가야 하는 존재로서 팔경법이 제정되었다. 게다가 수행 생활의 초보라는 점에서 남성보다도 한층 더 엄격한 규칙이 부가되었다. (……) 비구니 승단이 비구의 지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단계에 도달한 시점에서 그러한 규칙들은 철폐시켰어야 마땅했다. 만약 나의 상정이 들어맞아 현재 우리들 눈에 차별된 규칙으로 비추어지는 비구니에 대한 모든 규정이 편의적 조치의 흔적이라고 한다면 초기불교에 있어서 남녀차별의 원인은 한 번 정해진 규율은 무조건 고수해 가고자 하는 완고한 태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규칙을 제정하기에 이른 모든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규칙이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이렇다.”라고 무비판적으로 전통을 정당화해 가는 태도가 비구니 승단의 지위를 얕보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이다.
---「9장 불교 승단과 여성」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