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지리산 천왕봉을 마주하고 앉은 실상사의 저녁은 더욱 그러하다. 절 앞 무논에서는 논벼가, 도량 뒤로 야트막히 펼쳐지는 비탈에는 밭벼가 앙바틈히 자란다. 평지인 듯해 보이지만 해발 삼백오십 미터의 이곳에는 아직 감자꽃이 피지 않았다. 건너편 밭에서 엎디어 일하던 사람들, 이젠 오늘 일을 끝내려는지 밭둑으로 올라섰다. 그들은 저녁 이내에 부드럽게 윤곽이 풀려 희내려는지 밭둑으로 올라섰다. 곧 농장으로 돌아가 흙 묻은 몸을 씻고 쉴 것이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 키 큰 미루나무는 들을 건너온 바람을 품으며 한껏 부풀어 올랐다.
어제와 다름없을 터이나, 오늘 이것들이 이루는 풍경은 유난히 맑고 싶어 보인다. 어제 이 지리산에서 펼쳐진 행사에 감응한 바 있었던가. 지리산 위령제. 육이오전쟁을 전후하여 좌우 이념의 대립에 희생된 수만 명의 원혼이 아직도 중음신으로 떠도는 곳, 뱀사골 달궁 계곡에서 그들을 위한 천도 의식이 펼쳐진 것이다.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등 일곱 개 종단과 백구십여개의 시민 단체가 한자리에 모였고, 그 뜻에 동참하는 사람이 사천에 이르렀다. '빨치산'으로 활동하던 장기수 출신 생존자도, 그들을 '토벌했던' 군경 출신 인사도 함께 하는 자리였다. 그들이 오실 길을 닦고, 씻김으로 그들의 한을 풀어 주고, 춤과 헌주와 분향으로 그들을 위로했다. 이 날은 지난 2월에 입재한 '지리산 천도재 범종교인 백일 기도'가 끝나는 날이기도 했고, 함께 시작한 백두대간 종주, 청정 국토를 기원하며 지리산 자락을 따라 돈 팔백오십 리 도보 순례가 회향되는 날이기도 했다.
위령제가 던진 화두는 생명 평화와 민족 화해, 의식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었고, 한 가슴에 빨치산과 토벌대의 두 아들을 함께 묻은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고, 또한 개발과 발전이라는 사람 중심의 논리에 희생된, 삼라만상으로 표현되는 뭇 생명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을 위무하는 자리가 어제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다짐의 장이 되었다.
계속되어야 할 다짐의 자리, 적어도 살상사 주지인 도법스님에게는 그러하다. 위령제도 종교인이 주체가 되지 않았더라면 성사되기 힘들었을, 아직도 민감한 정치적 사안임이 기간 중에 다시금 구체적으로 확인되었고, 지리산 시설 계획을 무산시켰다 하나, 케이블 카, 골프장 등의 계획은 여전히 진행중이어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다시피 한 지리산이 뭇 생명을 품은 생명의 모태로 원상 회복되는 길은 멀어 보이다. 사람들은 지리산을 제 몸인 줄도 모르고, 두 손가락으로 제 눈을 우비려 한다. 이런 일은 지리산에 한하지 않고, 전 국토적이고 전 지구적인 현상인 것이 더욱 그를 절망시키낟.
그래서 그의 기도는 백 일로 끝나지 않고, 천 일로 이어지리라 한다. 새벽, 오전, 오후, 밤, 산문 밖 출입은 물론이고, 전화까지 끊고 올리는 기도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새삼스럽고 별난 의식'이 아니라 한다. 먹는 일처럼 심상한 일이라 한다. 참선이나 염불이라 해도, 경전 공부라 해도 좋을, 이름은 무엇이되어도 좋을 그의기도 의식은, 기적과 신비한 영험을 얻고자 함에서가 아니라, 진실과 만나고 진실과 하나 되기 위함이다.
--- 265~267
그 옛날에는 귀한 일이 아니었으니, 혜국스님은 나이 열셋에 "짧은 명 기루려고" 해인사로 보내졌다. 부모님은 아들이 열아홉만 넘기면 무탈해질 것이라고 믿고 그때까지만 절밥을 먹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혹 삼일, 혹 오일, 혹 칠일이면 득도할 줄로 알고" 열댓 살 먹을 무렵 일타스님을 은사로 불도에 몸 바칠 각오를 했다. 스무 살을 갓 넘길 즈음에 선방에 들게 되기까지는 학교를 다니고 글을 읽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제쳐 놓은세월"로 친다. 자신은 대학 과정까지 끝냈지만 속가 공부는 "별 이익이 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선방에 들어서 전강스님으로부터 판치생모 화두를 탔다. 그런데 그 뜻을 두고 전강스님은 "판때기 이빨에 털 난 것"이라고 했고, 경봉스님, 성철스님은 "앞니빨에 털난 것"이라고 달리 풀었다. 이제는 화두가 "형이하학적인 현상계가 생기기 이전의 근본 진리로서, 그것이 지니고 있는 암호가 문제이지 '글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되었지만, 그 때 어린 마음에는 어느 쪽이 틀려도 틀린 듯하여 전강스님에게 여쭈었다가 혼이 났다. 그러고는 해인사로 갔다.
그 무렵 열 세 살 적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써온 일기도 불태워 버리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정진은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성철스님의 권을 받고 장경각에서 오천 배씩삼칠일 기도를 올리기로 했다. 회향 마지막 날,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새로운 각오가 솟구쳤다. "이 몸을 부처님께 바치오니이다. 당신의 길이 아니면 가지를 않고 당신의 말씀대로만 살겠나이다."
혜국스님은 그 자리에서 오른손의 엄지와 약지를 뺀 나머지 세 손가락을 연비를 했다. 뼈만 남기고 손의 살이 다 타 버릴 때까지 육신을 태우는 일이란 삼매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을 터였다. 연비를 마친 다음 걸망 하나 메고 해인사를 등지고 나오자니, 이상도 했다. 하늘은 맑은데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업장을 다 씻어주는 듯한 상쾌하고 시원한 비였다. 그 길로 태백산 도솔암으로 들어갔다. 71년 가을이었다.
솔잎, 쌀, 콩 따위로 생식을 하며 그 해 겨울을 넘긴 이듬해 봄이었다. 하도 배가 고파 뜯어먹은 산나물이 초우라는 독초였다. 배를 칼로 끊는 듯한 아픔을 느낀 순간 그에게 신비스런 일이 펼쳐졌다. 그는 바로 물 건너 제주도에 사시는 어머니 곁에 가 있었다. 쌀의 뉘를 고르고 있던 어머니는 자신이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웬 찬바람이 이리 나는고?" 하실 따름이었다. 그러다 자신은 또 금방 광양 송암스님한테 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암스님도 자신이 부르는 소리르 못듣고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뒤이어 그는 바로 태백산으로 갔다.
그때에 봄만 되면 산삼을 캐러 다니는 아는 처사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을 등에 업고 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희한하게도 자신과 생김새도 입성도 똑같은 놈이었다. 두 처사는 그 놈을 덕석에 눕혀 놓고 놋숟가락 자루를 이빨 사이로 디밀어 입을 벌리려 하고 있었다. 그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자신과 똑같이 생긴 놈이 없어졌다. 동시에 처사들은 정신을 잃었던 스님이 "아까 그놈 어디 갔지?"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유체 이탈'의 이 일은 혜국스님에게 재출가의 계기가 되었다. "그렇구나. 이 몸뚱이는 내가 아니로구나. 불교에서 이르는 주인공, 또는 마음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구나."
--- pp 3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