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 언제였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제쯤일까? 알 수가 없다. 다시 너에게 묻는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 너는 항상 묵묵부답이기 때문이다. 그래, 모든 것은 나의 몫이다. 일상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어쨌든 너와의 통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두 걸음 ? 어디쯤이었을까? 너와 내가 손을 놓았던 자리가. 나는 그 어디쯤인가를 헤매는 중이다. 공간과 공간 사이. 그리고 그곳을 가로지르는 시간의 흔적들.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다. 미련 때문은 아니다. 단지 놓쳐버린 젊음의 한창이 그리울 뿐이다. 잠시 뒤를 돌아본다. 그러자 그녀가 내게 다가와 뺨을 갈긴다.
세 걸음 - 얼마 동안 이곳에 앉아 있었을까? 흩어지는 무리의 그림자들. 도심의 밤은 점점 취해가고, 점점 시들어 가고, 점점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그중에 한 조각을 떼어내 씹다가 흐릿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벌써 오늘이 되었구나. 자리에서 일어나 투덜투덜 걷는다.
네 걸음 - 나도 언젠가는 잊히겠지. 지워진다는 것, 어떤 기분일까? 내가 없을 그 빈자리에 살며시 서 본다. 어쩌면 일방적으로 삭제되는 것은 아닐까? 폐기처분당하는 것처럼 서러운 일은 없을 터.
다섯 걸음 - 밝음이 싫다. 어둠은 더 싫다. 딱 그 중간이 좋다.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그 중간의 자유분방함이 좋다. 그 촉촉함이, 미세함이 좋다. 부담스럽지 않아 좋다. 다가가면 나를 숨겨줄 것 같으면서도 보여줄 것 같은 그 미묘한 감성이 나는 그저 좋다.
여섯 걸음 - 오늘은 그냥 이대로가 좋아요. 당신은 어떤가요? 오늘이 어떻게 흐를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냥 지금이 좋을 뿐입니다. 오늘은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대로 멈추고 싶어요. 오늘 만요! 어떻게 안 될까요? 예외도 있잖아요.
일곱 걸음 - 시작과 끝은 다시 시작이다. 결말은 영원히 없을지도 모른다. 삶이 끝난다고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시작된 이상 계속되는 것이다. 어쩌면 시작이 누군가에게는 불행이 될 수도 있다. 시작은 삶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겠지. 그리고 불행하다고 스스로 단정 지어버리는 순간을 시작은 또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반복되는 시작을 나는 차마 경멸할 수 없다.
여덟 걸음 - 커피와 김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문득, 나를 보았다. 빌어먹을. 점점 변해가는 나의 관점. 시각의 변화가 인성도, 식성도 바꾸어 놓았다. 조합을 더는 찾아볼 수 없다. 무언가 모이는가 싶더니 다시 흩어지기 시작한다.
아홉 걸음 -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은 기억으로 남는다. 그 기억들을 지우고 싶다. 나도 모르게 차곡차곡 쌓여 가는 기억의 종자들. 내 머릿속에서 스스로 자라나 결국에는 한순간 나를 장악하고 마는 빌어먹을 녀석들. 기회를 엿보며 오늘도 나를 조여 온다. 이제는 잊을 때도 됐지만.
열 걸음 - 그런 날이 있다. 먹는 것조차 힘이 들 때. 어디 아픈 것도 아닌데 물조차 한 모금 넘기지 못할 때. 무슨 배부른 소린가 욕하겠지만 차라리 욕이라도 실컷 얻어먹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때. 바로 오늘이다.
출판사 서평
일상과 단상 속으로, 또는 과거와 미래로
“한 걸음, 두 걸음 걸어 보았습니다. 때로는 골목길도 걸었고, 때로는 오솔길도 걸었고, 가파른 산행도 했습니다. 때로는 지치는 길도 걸었습니다. 길은 하나로 통합니다. 어쩌면 생각하기에 따라서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 길은 내가 걸어온 길입니다. 또 누군가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하지만 이 길은 이정표가 없습니다.” - 애피타이저에서
이정표가 없는 길.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지금도 계속 걸어가고 있는 길이다. 그래서 미래는 늘 불확실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걸어가야 한다. 물론 걷다가 지치면 쉬어 가야 하겠지만. 뛰기도 하고, 방바닥에서 뒹굴기도 하면서 작가는 그렇게 하루를 걷는다.
시간을 탓하기도 하면서 시간 여행자라고 우기고 공간이동과 순간이동을 꿈꾸는 작가는 순박하기 이를 데 없다.
사소한 것에도 안절부절못하고 소심해졌다가도 한순간 훌훌 털어버리고 마는 작가는 담담하게 잊었다고 말한다. 깨진 기억을 찾아 퍼즐을 맞추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면서 절대 짜깁기를 하지 않는 집요함이 처절해 보이기도 한다.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그는 항상 누군가와 걷기를 원한다. 상실을 누군가가 기억하고 말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작가는 문장을 풀어 놓지 않는다. 문장을 잡고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문장을 단어로, 자음과 모음으로 늘어놓다가 다시 단어로 문장으로 되돌려 놓는다.
‘때로는 미래를 걷는다.’
이곳도 저곳도 아니다. 작정하고 미래를 걷는다. 작가는 미래를 오늘로 옮겨 놓는다. 그는 어처구니없이 돌아가는 맷돌이다. 그렇게 시간을 갈아낸다.
불면과 느림, 흐름의 상관관계 속에서
멈춤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다르다.
“취하고 싶어서 취한 것은 아니다. 시작은 내가 아닌 내가 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내겐 도피처가 필요했고 나는 나를 망가뜨리는 것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자신을 회피했다. 그리고 흐트러진 나 자신을 보면서 실없이 웃어 버렸고 외면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상대 없는 상대에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바보 같으니.”
작가는 멈추는 법을 안다. 그렇기에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자신을 ‘나 아닌 나’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것은 스스로가 멈춤이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는 흐름이 있다.
어떻게 하면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애써 다가가지 않아도 된다. 어느 순간 그는 스스로 가까이 다가온다. 삶의 본연을 알고 싶고 또 말하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오는 불면 속에서 그의 아픔을 알 수 있다. 느림과 흐름과 멈춤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 그러나 장순 작가는 이미 받아들였기에 담담할 수 있다고 말하곤 한다.
장순 작가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무작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선물을 해주기도 한다. 그리하여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단상을 풀어낼 수 있다. 장순 작가의 단상에서 초월을 느낄 수 없지만 분명 초월은 있다.
장순 작가는 자신이 단순하다고 말한다. 그는 또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그의 단상이 더 끌리는지도 모르겠다. 그와 함께 걷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장순 작가는 불면의 밤을 보내고 난 뒤에는 꼭 거울을 본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얼굴이 퉁퉁 부었다.’ 라고 말하며 오늘이 퉁퉁 붓지 않기를 장순 작가는 바란다.
그와의 공감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느림과 흐름과 멈춤만 있으면 그와 함께 터덜터덜 걸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 본문 중에서